영화제는 오로지 영화로만 말한다”
  • 나원정 ‘매거진M’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1.03 15:37
  • 호수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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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보이콧·태풍 차바·김영란법 ‘삼중고’ 떠안았던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우여곡절 끝에 10월15일 폐막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부산영화제)에 대해 많은 언론들은 ‘흥행 실패’ 또는 ‘참패’라는 제목을 경쟁적으로 달았다. 올해 영화제를 찾은 관객이 모두 16만5149명으로, 지난해 대비 27%나 줄었다는 것이 근거였다. 올해 상영작 수가 69개국 299편으로, 지난해 75개국 304편보다 소폭 줄어든 것을 강조한 기사들도 이를 뒷받침했다. 일부 매체는 ‘영화제가 망가졌다’고 한탄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면 오해를 부를 만한 표현이다. 영화제가 내용 면에서 질적으로 저하됐다고 착각할 만한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는 목소리가 많다. 일부 영화인들의 보이콧과 태풍 ‘차바’의 영향, 그리고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법)의 삼중고를 떠안고 개막한 부산영화제는 오히려 “영화제는 오로지 영화로만 말한다”는 대명제를 충실히 지켜낸 자리였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10월15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2016 부산국제영화제(BIFF) 폐막식이 열렸다. © 연합뉴스

10월15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2016 부산국제영화제(BIFF) 폐막식이 열렸다. © 연합뉴스

 

차분해진 분위기에 존재감 되찾은 ‘영화’

 

사실 관객 감소는 개막 전부터 예견된 바였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상영을 놓고 부산시와 빚은 갈등을 2년여 만에 일단락 짓고 치른 첫 영화제였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부산시의 압박으로 물러났고, 이에 반발한 영화인들은 올해 영화제를 전면 보이콧하겠다고 나섰다. 전년도 대폭 삭감된 국고지원금은 2년 연속 회복되지 않았다. 영화제를 못 열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오면서, 스폰서 유치와 영화 출품, 상영작 선정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숨통이 트인 건 불과 5개월 전부터다. 초대 수장이었던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이 이사장(조직위원장의 바뀐 명칭)으로 복귀해 강수연 집행위원장과 공조체제를 이뤘다. 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 보장을 위해 대대적인 정관 개정 작업이 이뤄졌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등 4개 단체는 보이콧을 철회했다. 그러나 한국영화감독조합 등 4곳은 여전히 보이콧을 유지했다. 그리고 9월28일 김영란법이 발효됐다. 부산영화제는 영화뿐 아니라 영화사들이 내년도 신작 라인업을 알리고, 영화인들이 친목을 다지는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에 하나 김영란법에 저촉될지 모른다는 최근의 우려가 영화제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설상가상으로 개막 전날인 10월5일 해운대를 강타한 태풍 차바 탓에 백사장에 마련된 야외무대 ‘BIFF 빌리지’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됐다. 해운대에서 예정했던 모든 행사를 부랴부랴 ‘영화의 전당’ 쪽으로 옮겨야 했다. 보이콧 등의 여파로 그간 관객의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대학 영화과 학생들의 참여율도 저조했다. 국내 스타 감독·배우가 불참을 선언한 탓에 대중들의 발걸음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런데 차분해진 분위기 덕분에 오히려 존재감을 되찾은 것이 있다. 바로, 영화다.

 

영화제의 화제작이 일찍 매진되는 건 흔히 있어온 일. 하지만 올해 시네필(영화광)과 마니아 관객들의 존재감은 그 어느 해보다 도드라졌다. 관객이 줄어들어서일까. 현장 발권을 위한 줄이 예년보다 짧아 티켓 구하기가 수월했던 올해다. 그러나 “좋다”고 입소문이 난 특정 영화들은 예년보다 유난히 높은 열기가 집중됐다. 지브리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을 잇는 일본의 차세대 애니메이션 거장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감독의 《너의 이름은》과, 지난해 《위플래쉬》로 국내외 극장가에서 각광받은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 등은 표를 구하지 못한 관객들의 하소연이 SNS 타임라인을 도배했을 정도다.

 

절정은 《너의 이름은》이다. 신카이 감독은 《초속5센티미터》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 《언어의 정원》 등 현 세대를 서정적인 감수성으로 응시하고 위로해 온 전작들이 국내에도 초청되며 꾸준히 호평을 받았다. 부산영화제가 올해 중순 그의 신작 《너의 이름은》을 초청키로 결정한 이유다. 그런데 8월26일 일본 개봉 이후 이 영화의 위상은 급부상했다. 일본에서 150억 엔(약 1700억원)이라는 예상 밖의 흥행을 거둔 것이다. 신카이 감독이 직접 참석하는 갈라 상영은 사인을 받기 위해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영화 포스터를 미리 사들고 온 관객들로 성황을 이뤘다. 부산영화제의 한 프로그래머는 “예년보다 팬덤이 강한 감독들의 화제작이 초청돼 마니아적 성향의 관객이 많이 몰린 것 같다”고 고무적인 심정을 내비쳤다.

 

 

관객 동원력은 줄었지만 집중력은 높아져

 

아시아 신인 감독 발굴과 육성은 부산영화제가 출범 때부터 내건 중요한 기치다. 때문에 아시아 신인 감독들의 작품을 심사하는 부산영화제 유일의 경쟁부문 ‘뉴커런츠’와 신인 감독들을 육성하는 ‘아시아영화아카데미’, 신인 감독들의 신작을 지원하는 ‘아시아영화펀드’ 등이 얼마나 충실하게 꾸려졌느냐는 그해 부산영화제의 내실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영화제를 찾은 아시아 신인 감독과 그들의 영화에선 예년보다 더 단단한 완성도와 결기가 엿보였다. 중국의 왕수에보 감독이 어느 소수민족 가족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다룬 뉴커런츠 부문 수상작 《깨끗한 물속의 칼》은 역대 어떤 수상작보다 “시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줬다”고 평가받았다. 가출소녀와 여장남자의 이야기를 꿈과 현실을 오가는 몽환적인 구조로 그려낸 한국영화 《꿈의 제인》은 주연배우 구교환·이민지의 호연으로 부산영화제 올해의 남녀 배우상을 휩쓸었다. ‘아시아 최고의 영화 등용문’에 닥친 위기가 젊은 영화인들의 창작열을 더욱 바짝 조인 듯했다면 과장된 해석일까.

 

영화의 전당 안팎에서 진행된 행사들도 해운대 무대에서 할 때보단 관객 동원력은 줄었지만, 행사에 대한 집중력만큼은 여느 해와 비할 바가 못 됐다. 부산영화제를 둘러싼 외압과 위협받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 한국의 이창동 감독을 비롯, 대만의 허우샤오시엔(侯孝賢),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등 아시아 거장들과 해외 주요 평론가들이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토론의 장을 만들었던 것도 의미 있는 일로 평가된다.

 

표현의 자유를 재차 고찰해 볼 상영작들도 있었다. 정치적 이유로 상영이 금지됐다가 30여 년 만에 극적으로 관객을 만난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은 이번 부산영화제 상영 후 작품성을 높이 평가받으며 내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역사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비판적으로 다뤘다는 이유로 이란 정부에 의해 필름의 절반가량이 잘려 나간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초청작 《자얀데루드의 밤》도 주목 받았다. 강수연 집행위원장은 올 초 부산영화제를 둘러싼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에도 “좋은 영화만 있다면, 해운대 바닷가에 천막을 치고라도 영화제를 열 작정으로 영화제의 명맥을 잇기 위해 마지막 힘까지 짜냈다”고 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올해 영화제가 ‘영화’라는 본분을 충실히 지켜낸 덕분에 더 나은 내년을 기약할 기회 또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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