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시대, ‘세태 풍자 영화’만 오더라
  • 나원정 ‘매거진M’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1.16 10:25
  • 호수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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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한 현 시국 상황에 맞춰 세태 풍자 한국영화들 쏟아진다

“요즘 한국은 다큐 만들기엔 너무 적합한 반면, 극영화 작가들은 ‘멘붕’이 오는 나라입니다.” 11월6일 막을 내린 다큐 피칭 전문 행사 ‘인천 다큐멘터리 포트’에서 《화차》(2012)의 변영주 감독이 한 말이다. ‘최순실 게이트’와 함께 폭로된 무수한 사건들이 웬만한 영화보다 더 기가 막힌다는 한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영화계에선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에 누가 같은 내용의 시나리오를 썼다면 너무 개연성이 없다고 투자를 못 받아서 영화로 만들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농담이 들려온다. 그러나 그런 상식 밖의 사태가 진실로 판가름 난 이상, 작가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제 웬만한 음모론을 써선 “최순실 게이트보다 밋밋하다”고 비교당할 게 빤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 2~3년간 한국영화계에서 정치 풍자극은 확고한 흥행 장르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개봉한 망나니 재벌 2세를 응징한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과 윤태호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사회 비리 폭로 스릴러 《내부자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기세는 올해로 이어졌다. 부실시공으로 인한 터널 붕괴 사고를 다룬 하정우 주연작 《터널》은 지난 8월10일 개봉 후 ‘사이다 영화’로 각광받으며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재난상황에 현실을 꼬집는 요소들을 절묘하게 배치해 사이다처럼 속 시원한 엔딩을 선보여서다. 올해 흥행 1위에 오른 ‘천만 영화’ 《부산행》과 2위 《검사외전》도 ‘가진 자’들을 향한 분노와 비판의 시선이 극적 긴장감의 원동력이 됐다.

 

지난 10월 나란히 개봉한 두 다큐의 이례적인 관객 몰이도 이 새로운 ‘흥행 공식’을 입증했다. 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낳은 반작용 효과일까. 국정원의 간첩 조작 사건을 파헤친 최승호 감독의 다큐 《자백》과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생전을 담아낸 다큐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10월 개봉한 지 각각 4주와 2주 만에 관객 11만, 8만 명을 쌍끌이하며 이례적인 돌풍을 일으켰다. 한국영화계가 이를 놓칠 리 없다. 단지 흥행적 측면의 얘기가 아니다. 관객의 열띤 호응은 세태 풍자의 수위를 더 과감하게 밀어 올렸다. 연말 특수를 노린 대작들이 속속 등장하는 12월. 현 시국을 연상케 하는 영화가 예년보다 더 많이 포진하게 된 이유다.

 

조의석 감독의 신작 범죄 액션 영화 《마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건국 이래 최대 게이트’ 문구 내건 영화도

 

아예 ‘건국 이래 최대 게이트’라는 홍보 문구를 내건 영화도 있다. 감시를 전문으로 하는 경찰 내 특수반을 좇은 스릴러 《감시자들》(2013)로 550만 관객을 모은 조의석 감독의 신작 범죄 액션 영화 《마스터》다. 《내부자들》의 이병헌, 《검사외전》의 강동원, 《기술자들》(2014)의 김우빈 등 화려한 스타 캐스팅으로 주목받았다. 조 단위 사기 사건을 쫓는 지능범죄수사팀장(강동원)과 정부 로비를 통해 법망을 피해 온 희대의 사기범 진 회장(이병헌), 그를 보좌하는 ‘브레인’(김우빈)이 서로 속고 속이는 추격전을 전개한다. 건국 이래 최대 금액의 사기 사건을 다루는 만큼, 권력형 비리와 정경유착 등 정·재계 최고 거물들의 폭로극으로 자연스레 연결될 수밖에 없다.

 

재난영화 《연가시》(2012)로 450만 관객을 모으며 깜짝 흥행에 성공한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는 국내 처음으로 원전을 다룬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으로 인해 노후된 채 가동되던 원자력발전소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고, 컨트롤타워마저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2차 폭발 위험이 제기되자, 원전 직원과 소방대, 일대 주민들이 목숨 바쳐 방사능 유출을 막아내는 이야기다. 제작비 150억원, 제작 기간만 4년이다. 2011년 일본 동북부에서의 강진과 쓰나미로 벌어진 원전 폭발에서 영감을 얻은 걸로 보이지만, 최근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경주 일대 강진이 불안감을 가중시켰던 국내 사태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김남길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나서는 원자력발전소 직원 역을, 김명민이 궁지에 몰린 젊은 대통령 역을, 이경영은 총리 역을 각각 맡았다. 《터널》에 이어, 세월호 참사 당시의 무능한 정부 대응이 다시 한 번 화두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내년 개봉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영화들도 있다. 《의형제》(2010)와 《고지전》(2011) 이후 장훈 감독의 오랜만의 복귀작인 《택시운전사》는 1980년 광주로 눈길을 돌렸다. 취재에 나선 독일 기자를 우연히 광주로 데려다주게 된 서울의 택시운전사를 주인공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다. 택시운전사 역엔 송강호가, 그와 함께 극을 주도하는 광주 대학생 역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스타덤에 오른 류준열이 캐스팅됐다.

 

군 비리를 파헤치는 내년 개봉작도 두 편이나 된다. 1급 군사기밀에 얽힌 극비 사건을 뒤쫓는 김상경·김옥빈 주연 영화 《일급기밀》과 미스터리한 사건에 얽힌 군 수사관이 음모에 연루되는 액션 스릴러 《제5열》이다. 《세븐 데이즈》(2007), 《용의자》(2013) 등 액션 스릴러에 일가견이 있는 원신연 감독이 송강호·류승룡·정우 등과 호흡을 맞춘다.

 

그 밖에 장동건·김명민 주연의 《V.I.P.》는 북한에서 온 특급 VIP가 연쇄살인 용의자로 지목받고 쫓기는 과정을 통해 국정원과 미국 CIA, 북한 공작원이 뒤엉키며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을 드러낼 예정이다. 최민식 주연의 《특별시민》은 최초 3선 시장에 도전하는 서울시장 변종구(최민식)를 중심으로 정치판의 명암을 폭로한다. 2000년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을 토대로 억울하게 10년간 옥살이를 한 소년의 누명을 벗겨주려는 변호사의 악전고투를 그린 《재심》(가제), 죄수가 된 전직 꼴통 경찰을 통해 교도소 내 범죄의 온상을 드러내는 한석규·김래원 주연작 《더 프리즌》 등도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담아낼 전망이다.

 

박정우 감독의 원전을 다룬 영화 《판도라》 © NEW

“영화는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역할”

 

물론 우려는 있다. 현 정권에 ‘미운털’이 박힌 영화사들이 모종의 압박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는 흡사 도시 괴담처럼 영화계에 떠돈 지 오래다. 2012년 대선 당시 주인공 광해에 대한 일부 묘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켜 문재인 민주당 대선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평가받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의 투자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 노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실화를 모티브로 천만 관객을 모은 《변호인》(2013)을 투자배급한 NEW가 각각 현 정권 친화적인 영화 《인천상륙작전》과 《연평해전》(2015)을 만들어야 했던 배후도 그러한 정치적 압박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청와대가 ‘특별 관리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공개된 바 있으니,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올 연말부터 관객을 만날 영화들 중에도 비슷한 운명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그러나 관객이 찾는 한, 시대를 들춰내는 영화들은 계속해서 나온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사회를 완전히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역할”(변영주 감독)을 하는 것일 테다. 올 연말 극장가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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