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된 대군 부인의 행보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1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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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는 세종의 며느리로 역사에 등장해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여섯 왕의 비호를 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살다 갔다. 그녀의 남편 영응대군은 38세의 세종과 40세의 소헌왕후가 여덟 번째로 낳은 막내아들이다. 송씨는 대군의 나이 12살 때 부인으로 봉해졌는데, 4년을 살고는 쫓겨났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송씨를 내치고 새 부인으로 바꾼 것은 순전히 시아버지 세종의 뜻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세종은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는다.

 

3년 상을 치른 영응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재가를 얻어 현재의 부인과 이혼하고 전처 송씨와 재결합했다. 송씨를 잊지 못해 몰래 만나 딸 둘을 낳았던 것이다(단종1년, 1453). 재결합에 성공한 그들은 곧이어 단종의 혼인에 간여하는데, 친정 조카가 왕비로 간택되는 쾌거를 이룬다. 정순왕후 송씨는 대군 부인 송씨의 조카이다.

 

송씨의 시아버지 세종대왕


세종이 내보낸 며느리, 다시 돌아오다 

 

영응대군은 안국방의 저택에다 재물 또한 누거만(累巨萬)이었다. 늦게 낳은 아들을 너무 사랑한 아버지 세종의 유언으로 내탕고의 모든 보물을 받게 된 영응대군은 노비 1만 명을 거느리는 거부가 된 것이다. 그런 영응대군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모든 보물은 송씨의 것이 됐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세조는 그 부인 송씨와 조카 딸 길안현주(吉安縣主)를 극진히 보살피고 많은 재물을 내려줬다. 왕의 비호를 받는 송씨의 권력도 점점 높아졌다. 한번은 대신들을 초청해 진수성찬을 차렸는데, 보장(寶障)으로 두른 특별한 한 자리에 사위 구수영(具壽永)을 앉혔다. 그리고 궁정 옷을 입힌 여종 수십 명을 좌우로 시립(侍立)하게 했고, 객으로 온 대신들에게 사위 구수영을 받들도록 했다(예종 1년, 1469). 이른바 ‘궁정놀이’를 한 것인데, 뒷말이 많았다.

 

송씨는 궁궐에 무시로 출입하면서 왕실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송씨가 진상(進上)한 비(婢)가 대내(大內)에 깔려 있어 궁중의 내밀한 정보까지 밖에서 다 받아볼 수 있었다. 대신들에게 송씨는 당연히 눈엣가시였고, 그로 인해 왕과 신하들의 논쟁이 잦았다. 어느날 성종 임금은 외출했다 환궁하면서 송씨 집으로 행차해 곡식 50석을 하사했는데, 경연에서 이 행차가 문제됐다.

 

신하 : 구수영으로 말하면 일개 어린 신하인데,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몸을 가벼이 하여 가서 보십니까? 

 

임금 : 구수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조 때부터 대군의 부인을 매우 후하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또 지나다가 들른 것이지 일부러 간 것은 아니다.

 

신하 : 부인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잘못입니다. 부인을 보기 위하여 여항(閭巷)으로 행차를 하심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동정(動靜)은 사관(史官)이 반드시 기록을 하니, 이렇게 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임금 : 내가 참으로 실수를 했으니, 앞으로는 마땅히 삼가겠다.

신하들에게 혼이 나고도 송씨에 대한 성종의 비호는 그치지 않았다. 그런 틈을 타 송씨는 임금의 뜻에 영합한 대사헌을 움직여 송사가 일어난 재산·전답·노비 등을 가로채기도 했다(성종 22년, 1491). 왕은 또 송씨 소유의 암태 목장을 호조에게 사주라고 명령했다. 호조에서는 “물과 풀이 부족해 말을 먹이기에 적당치 않은 허허벌판인 땅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라고 하며 사줄 수 없다고 했다(성종 24년,1493).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씨가 원하는 것은 다 이뤄졌다. 왜 이렇게까지 지나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대신들에게 왕은 “어찌 연유가 없겠는가” 라고 말했다.

 

성종이 보위에 오를 때 송씨는 자신의 저택을 기증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이다. 재물로 왕과 일종의 거래를 한 셈이다. 송씨를 비호하는 절대 권력은 연산군으로 넘어갔다. 새 왕이 탄생하자 송씨는 각종 보물과 노리개를 바쳤다. 이에 신하들은 그런 물건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이치에 어긋난 일임을 설파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송씨는 권력을 이용해 재물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다시 재투자해 키우는 방식으로 재물을 관리했다. 즉 국왕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아 통 크게 베풀고 거둬들이는 것이다. 

 

 

국왕과 거래하며 재산 늘려가 

 

자신의 재물로 절을 창건해 절 출입이 잦았던 송씨는 결국 추문의 주인공이 됐다. 동대문에 방(榜)이 붙었는데,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은 도리어 이것을 상언한 신하를 구속했고, 사관에게 명해 송씨에 대한 소문을 기록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의 이 말까지 기록한 조선시대 사관의 기록 정신이 새삼 돋보인다. 70을 바라보는 송씨에게 그 추문은 어쩌면 지나친 탐욕이 불러온 모함일 수도 있겠다. 

 

왕과 송씨의 거래는 계속됐다. 송씨는 양주 석도(石島)의 뽕나무 밭 7결(結)을 바치고, 쌀 80석을 하사받았고(연산군 6년, 1500), 몇 달 후 은을 진상하자 왕은 그 대가(代價)로 면포 1100 필을 하사했다. 송씨의 행보는 80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됐고, 중종은 송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소선(素膳-고기를 먹지 않음)을 행했다. 송 씨가 여섯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재물 때문이었을까.

 

<다산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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