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에서 그린재킷 입어야죠”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09 09:48
  • 호수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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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스폰서 없이 유럽에서 3승 거두며 스타덤에 오른 ‘노마드 전사’ 왕정훈

#1월29일 카타르 도하의 도하 골프클럽(파72·7400야드)에서 열린 중동시리즈 유러피언프로골프투어 제20회 커머셜뱅크 카타르 마스터스(총상금 250만 달러) 최종일 경기. 파 5, 18번홀에서 연장전이 벌어졌다. 합계 16언더파 271타(69-67-65-71)로 3명의 선수가 동타.

 

첫 번째 연장전. ‘노마드 전사’ 왕정훈(22·한체대)은 요아킴 라거그렌(스웨덴), 야코 반 질(남아공)과 연장전을 벌였다. 먼저 친 반 질은 세컨드 샷을 그린에 올려 2온을 시켰다. 라거그렌은 세컨드 샷이 그린 앞 벙커에 빠져 3온. 거리를 가장 많이 보낸 왕정훈의 세컨드 샷 볼이 핀을 지나 그린을 약간 오버했다. 라거그렌은 3온 2퍼팅으로 파. 이글 기회를 맞은 반 질의 첫 퍼팅은 덜 때려 홀에 못 미쳤다. 그리고 버디 퍼팅이 홀을 벗어나며 3퍼팅으로 파에 그쳤다. 그러나 왕정훈은 어프로치 샷을 홀 1m에 잘 붙여 버디로 연결하며 극적으로 우승했다.

 

왕정훈은 물이 제대로 올랐다. 스타 대접을 받고 있다. 우승에 이어 ‘골프지존’ 타이거 우즈(미국)가 출전해 ‘흥행몰이’에 성공한 중동시리즈 마지막 대회인 오메가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총상금 265만 달러) 1·2라운드에서 세계 골프랭킹 1위를 차지했던 마틴 카이머(독일), 리 웨스트우드(잉글랜드)와 한 조에서 티샷을 했다.

 

왕정훈이 유러피언투어에서 3승을 올리며 유럽 강자로 떠올랐다. 그는 핫산 2세 트로피와 모리셔스 오픈에서 연속 2승을 거두며 유럽투어 신인왕을 수상했다. 그런데 그가 또 우승을 거뒀다. 지난해 5월 모리셔스 오픈 이후 8개월 만이다.

 

유러피언투어에서 3승을 올리며 유럽 강자로 떠오른 프로골퍼 왕정훈 ⓒ 연합뉴스

어버이날 이어 아버지 생신에 연속 우승

 

왕정훈은 우승한 뒤 “카타르 마스터스에서 우승하게 돼 기쁘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우승이라 기쁨이 두 배다”라며 “올 시즌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는 것이 목표다. 그린재킷을 입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번 우승으로 그는 세계 골프랭킹 60위에서 39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두바이 레이스에서는 2위로 수직 상승했다. 태국에서 2주간의 훈련을 마친 후 곧바로 올 시즌 유러피언투어에 뛰어든 것이다. 첫 대회 아부다비 HSBC 챔피언십에서 공동 11위에 오르며 첫 시즌 테이프를 비교적 잘 끊었다. 그리고는 한 주 뒤 바로 우승했다.

 

왕정훈은 지난해보다 모든 기록이 좋아지고 있다. 특히 타수 부문에서 놀라운 변화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평균타수 71.75타에서 68.90타로 타수를 끌어내리고 있다.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장타자인 데다 쇼트게임과 퍼팅에서 몰라보게 뛰어난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올 시즌 드라이브 평균 거리는 288.55야드, 페어웨이 안착률은 56.43%, 아이언 샷의 정확도를 나타내는 그린적중률은 74.44%로 지난해 63.54%보다 10% 이상 끌어올렸다. 평균 퍼팅 수는 28.40타, 홀당 평균 퍼팅 수는 1.69타로 지난해 1.73타보다 좋아졌다. 샌드세이브는 52.94%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파5홀에서 장타력을 발휘하며 공격적으로 2온을 노려 승부수를 띄우는 전략이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연속 우승했을 때 재미난 일이 벌어졌다. 첫 우승한 날은 ‘어버이날’이었고, 두 번째 우승한 날은 아버지 왕영조씨의 60번째 생일이었다. 유러피언투어 첫 우승도 연장전에서 일궈냈다. 지난해 5월 유러피언투어 핫산 2세 트로피. 왕(王)을 기리는 대회에서 왕씨 성을 가진 왕정훈이 우승을 했다. 이 대회는 모로코 왕을 기념해 여는 대회다.

 

아프리카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의 다르 에스 살렘 로열 골프클럽에서 벌어진 대회 최종일 나초 알비라(스페인)와 동타. 연장을 치러 두 홀 만에 우승했다. 첫 번째 연장에서는 불리한 상황이 벌어졌다. 두 번째 샷이 그린 오른쪽 나무 근처에 낙하했다. 스윙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3번 만에 그린에 올리기는 했지만 내리막 10m 정도의 퍼트가 남았다. 그러나 왕정훈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또다시 버디로 연장 두 번째 홀로 승부를 끌고 갔다. 버디를 잡아 파에 그친 알비라를 꺾었다.

 

이어 그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인근 섬나라 모리셔스 부샴의 포시즌스 골프클럽에서 열린 아프라시아(AfrAsia) 뱅크 모리셔스오픈(총상금 100만 유로)에서 우승했다. 유럽 투어에서 2개 대회 연속 우승은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가 2014년 8월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과 PGA 챔피언십을 연달아 제패한 이후 1년9개월 만이다. 이때 20세263일인 왕정훈은 유러피언투어 사상 최연소 2개 대회 연속 우승자가 됐다. 아시아인으론 처음이다.

 

사실 왕정훈은 ‘준비된 선수’다. 별명 ‘노마드 전사’처럼 그는 정신력이 강하다. 180cm, 70kg에서 나오는 장타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기량을 소유하고 있다. 이는 탄탄한 기본기에다 다양한 경험이 가져다준 결과물이다. 1995년생으로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활약하는 김시우(22·CJ대한통운)가 라이벌이었다. 고려대 재학 중인 김효주(22·롯데), 연세대에 다니는 백규정(22·CJ오쇼핑) 등이 동기다.

 

왕정훈이 유럽골프투어 커머셜뱅크 카타르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 EPA연합

그린재킷과 메인 스폰서, 동시에 쥘까

 

주니어 시절 왕정훈은 필리핀으로 떠났다. 오직 이기는 것만 주입하는 한국식 교육에 염증을 느낀 데다 대회가 너무 많아 경제적으로 부담도 됐다. 비용이 저렴한 데다 실전을 중시하는 필리핀은 최고 연습장이었다. 기량이 부쩍 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학제상으로 유급이 돼 3학년 선수로 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 1학년에 출전했다. 대회마다 우승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3학년인데 1학년하고 경기를 한다고 다른 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는 필리핀 국가대표들을 제치고 늘 우승했다. 필리핀은 국가대표에게 급여를 지급하는데 어린 한국 선수가 국가대표를 이기니까 급여를 받기가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진퇴양난으로 고민할 때 중국에서 3부투어가 생겼다. 나이 제한이 없었다. 이때 그는 만 16세였다. 2012년 프로로 전향했다. 실력에 걸맞게 상금왕이 됐다. 그러면서 아시안투어를 뛰기로 했다. 유러피언투어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사용했다. 2013년 아시안투어에서 활약했으나 출전권을 잃었다. 재기를 노리던 그는 2014년 상금랭킹 21위, 2104년 상금랭킹 9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유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우승한 모르코행(行)은 당초 계획에 없었다. 출전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기선수였다. 다른 선수가 포기해야 출전이 가능한 대기번호 3번이었다. GS칼텍스 매경오픈도 날짜가 겹쳤고, 아들은 모로코행을 결심했지만 부친은 완강히 반대했다. 경비도 문제지만 이전 대회장에서 모로코 가는 데 26시간, 거기서 그다음 대회장인 모리셔스로 가는 데 20시간, 한국에 돌아오려면 또 20시간이 넘게 걸린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들이 대기순번으로 모로코까지 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왕정훈이 모르코에 가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버지가 “기내식 먹으러 가느냐”고 핀잔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모로코로 가서 연습이라도 하겠다”며 티켓을 끊었던 것이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는 대회 주최 측으로부터 출발 직전 포기선수가 있으니 출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스스로 결심한 것이지만 왕정훈으로서는 인생 최고의 결단이었던 셈이다.

 

이제 그의 목표는 마스터스 우승이다. 오는 4월 미국 애틀랜타 조지아주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에서 왕정훈이 ‘그린재킷’과 ‘메인 스폰서’를 동시에 손에 쥘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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