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의 웃음 속에서 국가 장래가 결정될 수도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3.09 14:08
  • 호수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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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계 이어 정치판까지 삼켜버린 ‘정치예능’ 폴리테인먼트의 시대 진지한 시사토론 활성화도 고민해야

탄핵 정국이 가열되면서 종편 예능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과거 같았으면 지상파 토론회가 떴겠지만, 요즘은 예능 토크쇼가 대세다. 화요일엔 채널A 《외부자들》, 수요일엔 TV조선 《강적들》, 목요일엔 JTBC 《썰전》이 정치 ‘토크’를 주도한다. 최근엔 MBN 《판도라》도 가세했다.

 

《썰전》에선 김구라의 진행으로 유시민 전 장관과 전원책 변호사가 격돌한다. 때로는 대선 주자들까지 나와 토크에 참여한다. 《강적들》은 확실한 진행자가 없는 가운데 박종진 기자, 강민구 변호사, 김갑수 문화 평론가, 김성경 아나운서, 이봉규 정치 평론가, 이준석 바른정당 당협위원장, 함익병 피부과 의사 등이 난상토론을 벌인다. 《외부자들》은 남희석 진행에 안형환 전 한나라당 의원, 전여옥 전 한나라당 의원, 정봉주 전 열린우리당 의원, 진중권 문화 평론가 등이 나온다. 가장 최근 시작한 《판도라》는 배철수 진행에 정청래 전 민주당 의원과 차명진 전 한나라당 의원, 조주희 기자 등으로 진용을 꾸렸다. 최근에는 ‘정치 풍운아’로 불리는 정두언 전 한나라당 의원이 가세해 관심을 높이고 있다.

 

JTBC 《말하는대로》 같은 프로그램도 정치예능은 아니지만, 정치인들을 출연시킨다. MBN 《아궁이》나 채널A 《풍문으로 들었쇼》는 연예계 소식을 주로 다루지만, 때때로 정치토크를 선보인다. 이외에도 인터넷방송 등을 통해 정치예능이 주목받는데, 최근 지상파도 이런 흐름에 부응해 KBS 《해피투게더》도 대선 주자 특집을 기획한다고 한다.

 

© 일러스트 신춘성

후발주자 안희정·이재명·유승민, 예능 수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대선에선 광장의 군중이 화두였다. 모든 대선 주자가 군중 동원에 총력을 기울여 바람몰이를 했다. 이땐 광장에서의 ‘사자후’가 중요했다. 1990년대부터 미디어가 핵심 전장(戰場)이 된다. TV 토론이 1992년에 시범 도입돼 1997년 제도화되면서 유권자의 관심이 집중됐다. 당시 방송사가 중계한 토론회만도 30여 회에 달했다. 이때 토론의 승자는 김대중 후보였다. 논리적인 그에게 대중은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TV 토론에 관심이 모였다.

 

그런 토론과 함께 2002년 당시엔 ‘노무현의 눈물’이라는 감성적인 광고가 큰 영향을 미쳤는데, 미디어의 감성적인 영향력은 이후 점점 더 커졌다. 2007년과 2012년엔 이명박과 박근혜 등 소위 대세론에 편승한 후보들이 TV 토론을 기피해 토론의 영향력이 축소된 반면, 《무릎팍도사》를 통해 안철수 바람이 불면서 예능의 파괴력이 전면화되기 시작했다. 박근혜 후보의 《힐링캠프》 출연도 큰 화제가 됐고, 문재인 후보편도 화제를 이어갔다. 당시 한류 스타편보다 대선 주자편의 시청률이 높게 나오면서 정치예능의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줬다.

 

특히 《썰전》의 성공이 눈부시다. 2017년 2월 한국갤럽이 발표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1위에 올랐다. 잠시 《도깨비》에게 밀린 것을 제외하곤 언제나 1위였던 《무한도전》의 철옹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시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으론 사상 최초 1위다. 목요일 비드라마 프로그램 중 10주 연속 화제성 1위이기도 하다. 예능 프로그램인데도 한 시사주간지가 조사한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썰전》도 2013년 2월21일 첫 방송 땐 시청률이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시엔 강용석 전 한나라당 의원과 이철희 정치 평론가가 고정 패널이었다. 인기가 오르던 중 강 전 의원은 추문으로, 이 평론가는 총선 출마로 각각 하차하면서 프로그램이 잠시 주춤했는데, 제작진이 신의 한 수를 뒀다. 진보 성향 네티즌의 스타인 유시민 전 장관과 강골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를 섭외해 주간 정례 맞대결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때부터 불길이 커지기 시작해, 최순실 사태가 기름을 끼얹었다. 시청률이 한때 10%를 넘어섰고, 200회 방송 땐 문재인·안희정·이재명·유승민 후보와 정세균 국회의장 등 정치 지도자들이 앞다퉈 축하 메시지를 보내 위상을 확인시켜줬다. 《강적들》 《외부자들》 《판도라》 등도 3~4% 정도의 시청률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며 순항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도 지도자급 정치인들을 수시로 출연시켜 영향력을 과시한다. 《외부자들》은 신생 프로그램임에도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와 대수롭지 않게 전화연결을 해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SBS는 《대선주자 국민면접》을 5일 연속 특별기획으로 준비하며 전형적인 토론회가 아닌, 종편 정치예능 스타일을 차용(借用)했다. 이 프로그램에도 좋은 반응이 나와 문재인편·안희정편 등의 시청률이 7%를 넘었다. 방송국이 중시하는 ‘2049 시청률’(20~49세까지의 연령대 시청률)의 경우, 이재명편이 4.3%가 나올 때 동시간대 MBC 《PD수첩》은 1.4%, KBS 《하숙집 딸들》은 2.5%였다.

 

특히 후발주자인 안희정·이재명·유승민 후보 등이 예능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말하는대로》 안희정편은 시청률 3.99%로 자체 최고를 찍었고, 인터넷방송 《양세형의 숏터뷰》 안희정편·이재명편은 조회 수가 각각 200만 건이 넘었다. 특히 안희정 후보가 《양세형의 숏터뷰》에 예능적으로 나와 모범생 이미지를 적절히 상쇄했다는 평을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즈음에 지지율이 치솟았다. 유승민 후보도 예능에서 대중과의 친밀성을 높이고 있다.

 

《썰전》에선 김구라의 진행으로 유시민 전 장관과 전원책 변호사가 격돌한다. 사진은 2월2일 방송된 《썰전》에 대선 주자 릴레이로 출연한 유승민 의원 © jtbc

정치예능의 인기는 다양한 부문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일단 방송사 입장에선 새로운 얼굴의 예능이 필요했다. 정치예능은 그 요구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저렴한 제작비로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하는 경제성까지 얻었다. 정치인 입장에선 대중과의 접점이 필요했다. 예능 홍보가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는 지난 2012년 대선 때 안철수 후보의 《무릎팍도사》, 박근혜 후보의 《힐링캠프》가 이미 증명했다. 별다른 정책 내공 없이도 이미지만으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다.

 

대중의 입장에선 속 시원하고, 쉽고, 직설적인 정치해설이 필요했다. 기존의 점잖고 중립적인 보도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데 반해 예능은 복잡한 문제들을 한 방에 쉽게 정리해 준다. 정식 시사 프로그램보다 더 날 선 언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토론이 정책적인 부분으로 흘러가는 반면, 정치예능은 인물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 대립의 양상도 토론이 차분하다면, 예능은 막말·말싸움이 펼쳐지며 더 자극적이다. 재미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며 점잖은 ‘훈장질’을 ‘극혐’으로 여기는 젊은 세대일수록 가벼운 예능에 친숙함을 느낀다. 또 복잡한 해설보다 예능식의 ‘한 방 정리’를 선호한다.

 

시사 프로그램을 선도했던 지상파는 최근 신뢰를 상실했다. 지상파 방송사가 정치인을 검증한다고 해도 주목도가 떨어진다. 보수정권 이후 강골 달변의 진보 논객들이 지상파 토론 프로그램에서 사라져 더 맥이 빠졌다. 김갑수 문화 평론가도 그렇게 사라진 인물 중 하나인데, 요즘 《강적들》에서 다시 격전을 벌이고 있다. 종편 시사 프로그램은 직설적인 해설로 관심을 모았지만, 보수 편향성이 문제가 됐다. 이럴 때 정치예능에서 제대로 된 보수·진보 ‘맞짱’의 판을 깔았다. 《썰전》 유시민, 《외부자들》 정봉주, 《판도라》 정청래 등은 모두 이름을 날린 야권 파이터들이다. 이런 패널들이 보수·진보 동수로 나와 전면전을 펼친다.

 

2012년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박근혜 후보 © SBS

녹화 후 편집·이미지 덧칠, 정치적 왜곡 우려도

 

정치토크와 예능의 접목은 미국에서도 나타난 현상이다. 미국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2016년 미 대선 당시 정치예능인 심야 토크쇼에서 정보를 얻었다는 비율이 25%(중복응답)였다. 복잡하고 진지한 것에 지루함을 느끼는 문화가 정치예능의 토양인데, 인터넷이 이런 경향을 강화한다. 이런 일반적인 경향에 기존 시사 프로그램의 신뢰가 떨어진 우리 사회의 특수성까지 겹쳤다. 지난 18대 대선 땐 예능이 출연자를 떠받들어주고 각본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안철수·박근혜 후보 등이 수혜자가 됐지만, 요즘은 그런 프로그램들(《무릎팍도사》 《힐링캠프》)이 아예 사라진 세상이다. 예능판이 훨씬 치열해진 것이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예능은 어쨌든 재미 위주, 가십 위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SBS 《대선주자 국민면접》엔 재미와 흥미성 위주로 패널이 선정되고 토크가 이어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게임·고스톱·부부싸움·패션·발음 등의 토크 주제가 대선 주자 검증과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유승민 후보의 딸과 전화연결을 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미모로 유명하다는 것 말고는 굳이 연결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진행자가 문재인 후보의 ‘노잼’(재미없음)을 거론하며 ‘저희 방송은 어떻게 하죠?’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프로그램의 무게중심이 재미에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드러낸 셈이다.

 

다른 정치예능에서도 가정사나 외모처럼 자극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진지한 얘기를 할 때도 구체적인 정책이나 예산 같은 사안보다는 정치적 논란의 사건 정도만 다룬다. 근본적으로 예능은 녹화 후 편집에 공을 들이는 장르이기 때문에 제작진의 의도가 크게 개입된다. 이미지와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인데, 이것은 정치적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와 말 잘하는 사람이 이미지 덧칠하기로 뜰 가능성이 크고, 웃음 속에서 정작 중요한 정책을 논의하는 능력이 퇴화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정치와 예능의 만남은 이미 주어진 현실이고 대세다. 예능의 웃음 속에서 국가의 장래가 결정될 수도 있는 폴리테인먼트 시대인 것이다. 정치예능을 보다 내실 있게 발전시켜 가면서, 동시에 정책을 다루는 시사 토론의 활성화도 고민해야 할 시점이란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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