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1995년 골목성명은 YS 정치보복의 항거였다”
  •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 승인 2017.04.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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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 출간 회고록 뜯어보니

 

“나의 애인이었고 신랑이었고 남편인 그분, 자식들의 아버지이고 손자 손녀들의 할아버지인 그분. 대한민국 제11대, 제12대 대통령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분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가 지난달 출간한 회고록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서문은 이 책이 태생적으로 내포한 역사적 오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자식들의 아버지이고 손자, 손녀들의 할아버지”였던 ‘그분’은 다른 누군가의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을 억압하고 학살한 12.12사태와 5.18의 책임자로 역사에 기록돼있다. (※기자의 주관주의. 이 기사는 대상이 된 책만큼이나 주관적인 문장을 일부 포함하고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저자의 회고록이다. 당연히 모든 서술은 ‘전지적 이순자의 시점’에서 이뤄진다. 그의 말마따나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이순자) 간직해온 ‘기억들의 재구성’이었다.” 72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 속엔 이씨에 의해 ‘재구성’된 현대사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 여사 ⓒ 연합뉴스

 

■“5.18특별법은 YS의 정치보복이었다”

 

이순자씨는 자신의 책 속에서 “5.18특별법을 만들어 전직 대통령 신분인 그분을 구속시킨 김영삼 대통령은 국내외로부터 정치보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비판을 희석시키기 의해 뒤늦게 착수한 것이 ‘정치자금 수사’였다”고 회술했다. 

 

‘정치 검찰’을 규탄하며 ‘김영삼 정권의 정치보복극’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논조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최근 출간한 회고록에도 그대로 유지된다.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정치자금 수사는) 김영삼 정권의 검찰이 나의 도덕성에 상처를 내기 위해 고의로 (진실을) 묵살해버리고 왜곡해 발표한 것”이라며 “5.18특별법 제정과 함께 (10․26에 대한) 수사를 재개한 검찰은 1996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그 돈을 내가 임의로 사용했고, 박근혜씨도 마치 합수부로부터 깨끗하지 못한 돈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정말일까. 

 

 

■“전 전 대통령 구속은 ‘기습적인 역사의 역류’”​

 

“1995년 12월 1일 오후2시. 검찰소환장이 그분 앞으로 날아들었다. 모처럼 얻은 평화 속에서 평범한 행복 가꾸기로 기뻐하던 우리 가족을 향해 또 한 번 정치보복의 광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그분은 그 소환에 불응하기로 결심했다. 김영삼 정권의 작태는 ‘역사 바로세우기’가 아니라 역사를 파괴하고 말살하려는 폭거라고 판단했다. 역사와 국민을 볼모로 하는 그런 위험한 발상에 대해서는 한때 국정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면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뤄진 것이 이른바 ‘골목 성명’이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5.18 특별법 제정’ 선언 이후 전 전 대통령이 검찰의 소환장에 불응해 고향 경남 합천으로 내려가기 직전의 상황이다. 이순자씨는 5.18 특별법 제정을 두고 “세계인권선언이 천명하고 있는 소급입법금지와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위헌적 폭거”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선 처벌에 시효를 두지 않는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란 뼈아픈 역사를 가진 독일의 경우 ‘나치전범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1933년 1월30일부터 1945년 6월15일까지 있었던 전쟁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정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무고한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감행하며 수많은 사상자들을 냈던 5.18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전 전 대통령 역시 그 역사적 심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도 5․18 희생자다”

 

“저희 때문에 희생된 분들은 아니지만, 아니 우리 내외도 사실 5.18 사태의 억울한 희생자이지만”

“이 엄청난 비극을 잉태한 소요사태는 훗날 어찌된 셈인지 광주사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남편을 임기 내내 그리고 퇴임 후 법정과 감옥에 이르도록 악몽처럼 따라다녔다.”

이씨의 ‘유체이탈화법’은 5.18에 대한 서술에서 빛을 발한다. 전 전 대통령은 5·18 당시 수사책임자인 동시에 정보책임자였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억울하게 매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전 전 대통령 역시 자신의 회고록에 5·18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며 자신을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라 비유하며 “지금까지 나에게 가해져온 모든 악담과 증오, 저주의 목소리는 주로 광주사태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잡은 뒤 계엄군을 동원해 광주시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진상규명조사와 검찰 수사, 재판을 통해 드러난 바 있다. 

 

 

■“직선제 제안은 전 전 대통령이 했다”

 

“집무실에서 노 대표와 마주앉은 그이(전 전 대통령)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국민의 뜻이 직선제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노 대표의 처음 반응은 분명한 거부였다.”

“그이가 직선제 수용을 거부하고 있는 노태우 대표를 설득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틀의 시간을 주어가며 직선제 선거에서도 노태우 후보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설명해나간 끝에 6월19일 노 대표의 결심을 얻어낼 수 있었다.” 

1987년 4월13일. 전 전 대통령이 ‘간선제를 유지한다’는 골자의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직선제로의 개헌을 바라던 국민적 염원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고 6월에 민주항쟁의 시발점이 됐다. 조치 이후 전국 각지에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으며, 이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드러남에 따라 6월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렸다. 결국 당시 노태우 대표가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6·29 선언을 했다. 

 

 

■“10․26사태 이후 겪은 일은 대한민국의 현대사

 

“10․26사태가 발생한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분이 겪어내야 했던 일들은 이제 그분의 개인사를 넘어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자신이 ‘역사’를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하지만 그의 ‘역사’는 지극히도 주관적인 역사였다. 5.18이 있었던 1980년에 대한 이씨의 기록은 같은 해 8월 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하며 자신이 겪었던 무용담이 가까운 경험담이었다. 1979년 10․26과 1980년 8월 대통령 당선 사이의 기록은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한 듯 공란(空欄)이었다. 지난 하반기 터진 ‘비선실세 게이트’와 이로 인한 대통령의 구속이라는 쓸쓸한 말로를 목도해야 했던 국민 한사람으로서,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전직 대통령 부부의 회고록을 보며 또 한번 씁쓸함을 느낄 뿐이다.

 

한편 전 전 대통령은 4월3일 총 3권, 모두 합하면 2000쪽에 달하는 분량의 회고록을 출판했다. 그는 이번 회고록에 성장 과정, 10.26, 군인 시절의 이야기와 대통령 퇴임 후 겪은 개인적 수난 등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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