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재팬’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할리우드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4.05 15:32
  • 호수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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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 《공각기동대》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절반의 만족뿐” 아쉬운 평가

 

‘뜨거운 감자’의 정체가 공개됐다. 스칼렛 요한슨 주연 영화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얘기다. 일본 사이버펑크(cyberpunk)의 원류인 《공각기동대》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이 프로젝트는 제작 초기 단계부터 ‘화이트워싱’(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제작할 때 무조건적으로 백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 논란이 불거지는 등 크고 작은 잡음에 시달려왔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이 영화는 원작이 담고 있던 철학적 고민의 무게는 덜어내고 화려한 비주얼을 앞세웠다. 그래서 원작의 세계관을 알지 못하는 관객들까지 폭넓게 만족시킬 수 있는 블록버스터로 탈바꿈한 모양새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고른 흥행 성적을 거두기 위한 안전한 변신으로 보이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개성 강한 원작이 할리우드의 문법을 만나 고유의 매력을 잃게 된 탓이다.

 

일본 만화 《공각기동대》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한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원작 깊이 덜어낸, 그저 무난한 블록버스터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를 합성한 용어인 사이버펑크. 이는 컴퓨터로 대변되는 정보사회와 첨단기술의 폐해를 부각하는 SF의 하위 장르를 가리킨다. 보통 이 장르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안에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성 상실 등의 철학적 주제를 이야기한다. 세기말의 불안감이 팽배했던 1980~90년대, 가상현실이나 인공지능 같은 용어의 등장과 기술의 빠른 발전은 장르의 유행을 부추겼다.

 

사이버펑크 장르에서 영화의 원류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라면, 만화는 1989년 일본에서 출간된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를 꼽아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연출한 동명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1995년 개봉한 이후 전 세계 SF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걸작이다.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1997)와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1999~2003) 시리즈 등도 《공각기동대》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다. 이처럼 기념비적인 작품을 실사로 옮긴 것이니만큼 제작 초기 단계부터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에 엄청난 관심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원작의 재미는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무의미한 미래 사회에서 실존적 고민에 봉착한 한 개인을 다룬 심오한 주제로부터 나온다. 주인공 구사나기 모토코 소령과 동료들이 속한 ‘공안 9과’가 특수범죄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 역시 원작만의 독특한 개성을 만든다.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도 비슷한 결을 지녔지만, 내용은 대폭 축소되고 주인공 메이저(스칼렛 요한슨)의 성장 스토리라는 줄기가 강조됐다.

 

테러 사건을 수사하던 메이저는 자신의 사라진 기억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혼란을 겪던 그는 점차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기계의 몸을 가지기 전 어떤 삶을 살았던 존재인지를 되짚어가려 한다.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억을 조작당한 상황에서도 ‘나는 과연 나 자신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메이저의 여정은 결국 정체성 찾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메이저를 창조한 닥터 오우레(줄리엣 비노쉬)처럼 원작에 없는 캐릭터를 만드는 등 영화만의 재해석을 가한 부분은 더러 있으나, 그 효과는 미미한 수준이다. 화려한 비주얼에서 오는 쾌감은 분명 있지만, 원작의 무게감과 깊이를 덜어내고 평범한 SF 블록버스터를 자처한 듯한 느낌이 강하다.

 

화이트워싱 논란 또한 여전히 남아 있다. 제작 초반 스칼렛 요한슨의 캐스팅이 결정됐을 때 아시아계 할리우드 배우들과 원작 팬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제작사 파라마운트와 드림웍스가 스칼렛 요한슨이 동양인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CG를 진행 중이라는 루머가 퍼지면서 논란에 한층 더 불이 붙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극 중 요한슨이 연기한 캐릭터의 이름과 몸은 실제가 아니므로 반드시 아시아 배우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할 이유가 없다”며 일축한 바 있다. 하지만 극 중 메이저의 과거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새롭게 탄생한 메이저의 의체(義體)가 흠 없이 아름다운 피조물로 언급된다는 점을 떠올릴 때 비판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공각기동대》에서 바토 역을 맡은 요한 필리프 아스베크(왼쪽)와 메이저 역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


 

또다시 도마에 오른 ‘화이트워싱’ 논란

 

물론 이는 비단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에서만 불거진 비판은 아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2015)은 원작 소설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등장한 인물인 민디 박을 백인 여배우로 바꿨고, 《닥터 스트레인지》(2016)에서는 원작에서 티베트인으로 묘사된 에이션트 원을 틸다 스윈튼이 연기하며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와이가 무대인 《알로하》(국내 미개봉작)는 중국과 하와이 혼혈인 주인공 역에 엠마 스톤을 캐스팅해 뭇매를 맞기도 했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할리우드가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인기를 누리는 백인 스타가 아닌 아시안 배우를 기용했을 경우 흥행 실패를 우려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문제는 만화와 게임 등 ‘메이드 인 재팬’ 원작은 할리우드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콘텐츠라는 점이다. 색다른 소재와 원작의 방대한 팬덤 때문이다. 그때마다 화이트워싱뿐 아니라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재해석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일본의 대표 콘텐츠 중 하나인 ‘드래곤볼’을 재앙에 가까운 만듦새의 실사영화로 완성해 원작 팬들의 원성을 샀던 《드래곤볼 에볼루션》(2009)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워너브러더스는 사이버펑크의 고전 중 하나인 《아키라》 실사영화를 제작하려 했지만, 몇 년간 제작비와 ‘할리우드화(化)’ 시나리오 작업 사이에서 방황을 거듭하다 결국 프로젝트 자체를 무기한 중단한 상태다. 그런 가운데 할리우드의 일본 원작 발굴 작업은 계속 이어진다. 일례로 레전더리픽처스는 지난해 12월 감독을 확정하고 포켓몬스터 게임 시리즈인 《명탐정 피카츄》 실사영화 제작에 돌입했다.

 

북미에서 먼저 개봉돼 흥행에 성공했고, 4월 국내 개봉을 앞둔 《파워레인저스: 더 비기닝》 역시 일본의 동명 인기 시리즈가 원작이다. 다만 이번 개봉작은 1993년 할리우드에서 어린이 TV 시리즈 《마이티 모르핀 파워레인저스》로 리메이크했던 버전의 리부트다. 1990년대 시리즈를 보고 자란 세대의 향수를 정확히 겨냥한 것이 흥행 비결로 꼽히고 있다. 사실 악당과 파워레인저스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구도는 재해석이란 게 필요하지 않기도 하다. 단순히 인기 원작의 판권 확보가 아닌 의미 있는 재해석에 대해 할리우드가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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