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역사를 대변하는 안성기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4.20 17:15
  • 호수 14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데뷔 60주년 맞아 기념 특별전 갖는 ‘국민배우’ 안성기

 

한국영화에서 안성기가 연기한 캐릭터는 얼마나 다양할까. 어쩌면 그가 연기하지 않은 캐릭터를 헤아리는 게 더 빠를지 모른다. 1957년 6살의 나이로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출연한 뒤, 그가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는 130여 편(공식 기록 기준. 자료가 유실된 작품들까지 포함하면 안성기의 출연작은 160여 편에 달한다)에 이른다.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는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는 한국영화가 걸어온 60년의 역사 그 자체이며, 결과적으로 그는 한국영화 전체를 지탱해 온 중요한 축이다.

 

배우 안성기 © 뉴스뱅크이미지

시대가 요구하는 얼굴로 살아온 ‘국민배우’

 

‘국민배우’는 안성기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 표현이다. 폭넓은 대중적 인지도, 탄탄한 연기 이력, 선한 인품 등의 조건에 두루 부합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수식어다. 그중에도 성실함은 언제나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연기의 길을 잠시 접었던 그는 20대 후반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 뒤 꾸준히 영화를 찍었다.

 

안성기가 연기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대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예민하게 감지된다. 그가 성인 연기자로 발돋움하는 성공적 발판이 되어준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 대표적이다. 서울 변두리 개발 지역에서 일하는 세 친구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안성기는 지방에서 상경한 뒤로 말을 더듬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를 연기했다. 1980년대가 청년들의 무기력한 침묵을 강요하는 공포정치의 시대였음을 감안할 때, 덕배의 캐릭터가 지닌 의미는 남다르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덕배의 모습이 당시의 대중 심리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도시의 척박한 현실에 좌절하는 《바람 불어 좋은 날》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그 시절 한국 사회의 모순과 청년들의 소외감을 대변했다고 평가받는다. 안성기에게 대종상영화제 신인상을 안긴 작품이기도 하다.

 

《뽕》 《애마부인》 시리즈로 대표되는 성인영화나 코미디·멜로 영화가 주를 이루던 1980년대에 안성기의 행보는 조금 독특하다.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사회 풍자적 메시지가 있는 영화들을 주로 선택한 것이다. 당시 《만다라》(1981)와 《안개마을》(1982)로 대표되는 임권택 감독과의 만남, 《꼬방동네 사람들》(1982)과 《고래사냥》(1984) 등을 통해 배우 안성기를 영화적 페르소나로 여겼던 배창호 감독과의 잇따른 작업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른바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라 불리는 시기다.

 

속세의 번민 때문에 괴로워하는 수도승(《만다라》), 마을이 품은 비밀의 중심에 있는 백치 청년(《안개마을》), 자유롭게 방랑하는 비렁뱅이(《고래사냥》) 등 안성기가 연기한 인물들은 무력한 시대 상황을 풍자하거나 그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 갈등한다. 대형 옥외 간판 작업 때문에 철탑에서 서로의 인생을 푸념하던 칠수(박중훈)와 도색공 만수(안성기)의 행동이 노사 갈등으로 인한 고공투쟁으로 오해받으며 생기는 소동을 그린 《칠수와 만수》(1988)도 마찬가지다. 장기 복역 중인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로 묶여 가난한 노동자로 살아가는 만수의 얼굴에 드러났던 삶의 애환. 무력함과 난처함, 그리고 피로가 뒤섞인 그 표정은 배우 안성기가 1980년대를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 얼굴이었다.

 

데뷔 60주년을 맞아 열린 안성기 기념 특별전 포스터 © 한국영상자료원


1990년대에 이르러 안성기의 스펙트럼은 엄청나게 넓어진다. 배우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이른바 ‘기획영화’의 시대가 열렸던 충무로의 분위기와 맞물린 변화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안성기는 당시 영화 전문 월간지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 들어오며 굵직한 주제가 사라지고, 이슈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맞춰진다. 영화가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안성기의 얼굴은 이제 《남자는 괴로워》(1995) 속 안 과장처럼 위에서 억누르는 구세대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세대 사이 ‘낀 세대’의 고충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그런가 하면 고통스러운 왕(《영원한 제국》), 능청스러운 비리 경찰(《투캅스》), 고뇌하는 지식인(《태백산맥》), 한국형 SF 장르영화의 주인공(《퇴마록》) 역시 안성기의 몫이었다. 여전히 소시민의 얼굴을 가장 잘 대변함과 동시에 한국영화의 장르적 외연을 넓혀가는 실험적 과제 역시 ‘국민배우’에게 주어진 셈이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부터 안성기는 극에서 비중을 조금 줄이더라도 무게감을 더하는 역할로 자신의 위치를 옮겨간다. 항상 주연의 자리에 있던 그가 시상식에서 《무사》(2001)로 조연상을 수상한 것도 이 즈음이다. 한국영화에서 영원히 스스로 빛나는 별이기보다 ‘함께 빛나는 별’이길 자처하는 그의 바람은 《라디오 스타》(2006)의 매니저 박민수의 얼굴 안에서 형형하게 빛난다. 인생의 희로애락뿐 아니라 한국영화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어온 배우는 이제 죽음의 냄새에 젖어 있으면서도 삶의 향기를 욕망하는 사내의 깊숙한 심경(《화장》)까지 깊이 있게 담아낸다.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고래사냥》《투캅스》(왼쪽부터)

“나의 최고 작품은 언제나 다음 작품이다”

 

배우 안성기가 감당해 온 역할은 폭넓다. 그는 작품 안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영화계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성실하게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한국영화계가 위기에 봉착하거나 명예를 드높여야 하는 순간 모두에는 언제나 안성기가 있었다.

 

1999년부터 불거진 스크린쿼터 논란과 영화 불법 다운로드 근절 캠페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과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ISFF) 집행위원장 등 수많은 ‘감투’ 역시 마다하는 일이 드물었다. 한국영화의 큰 어른이자, 함께하는 이들과 후배들을 생각하는 사려 깊은 선배였기에 가능한 행보였다. 동시에 그는 후배 배우 이병헌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할리우드 그라우맨스 차이니즈 극장 앞에 손자국을 남겼으며, 멀티플렉스 극장에 임권택 감독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헌정 상영관을 가진 배우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안성기가 한국영화계에서 지닌 상징적 의미에 대한 예우이자, 그가 지닌 책임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안성기의 가장 큰 과제는 연기다. 그는 아직도 “나의 최고 작품은 언제나 다음 작품이라는 마음가짐을 항상 지니고 있는” 현역이며, 왕성하게 다음 작품을 고민하는 ‘천생 배우’다. ‘데뷔 60주년’이라는 숫자가 단순히 의미 있는 기록으로만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배우 안성기에게서 발견되어야 할 얼굴은 아직 무궁무진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