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검증 아닌 스캔들로 얼룩진 ‘최악 선거’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5.04 13:23
  • 호수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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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선 1차 투표 통과한 마크롱-르펜 2차 결선 맞붙어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던 2017 프랑스 대선의 1차 투표 결과가 나왔다. 4월23일 중도 성향의 정치 신예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와 대표적 극우정치인 마린 르펜 국민전선 당수가 1· 2위를 기록하며 결선에 올랐다.

 

프랑스 대통령선거는 결선투표제다. 1차 투표에서 과반을 획득한 후보가 없는 경우 1·2위가 결선에서 맞붙는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우선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후 유럽 대륙을 넘보고 있는 소위 ‘트럼피즘(트럼프식(式) 자국우선주의)’이 유럽 대륙, 그것도 유럽연합(EU)의 심장부인 프랑스까지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는 선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력 주자 르펜 후보는 당선 후 ‘프렉시트(프랑스의 EU 탈퇴)’를 추진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던 터다. 따라서 이번 대선을 프랑스와 EU 전체의 운명이 결정되는 선거로 봐도 과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4월23일(현지 시각) 열린 프랑스 대통령선거 1차 투표 최종집계 결과,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가 24.01%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 AP연합


 

사상 처음 국가 비상사태서 치러진 선거

 

전 세계 언론은 이번 대선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미국 LA타임스는 “나폴레옹보다 어린 새로운 지도자”가 나왔다며 마크롱 후보를 주목했으며, 좌파 성향이 강한 남미 언론들은 “프랑스 좌파의 몰락”에 대해 비중 있게 보도했다. 스페인 일간지 엘 파스(El Pais)는 마크롱 후보를 “유럽 정가(政街)의 새로운 골든 보이(Golden Boy)”라고 지칭했다. 영국 언론은 최근 회자되는 ‘데가지즘(기존 정치체제와 인물 모두를 바꾸자는 운동)’의 영국 상륙을 막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번 대선은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국가 비상사태에서 선거가 치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5년 샤를리 에브도 총격 테러를 시작으로 지난해 니스 사태까지 최근 몇 년간 프랑스엔 각종 참사가 이어졌다. 더구나 투표를 이틀 앞둔 4월21일 일어난 샹젤리제 거리 총격 테러 사건은 프랑스 전역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당시엔 대선후보들 간의 마지막 TV토론이 진행 중이었다. 사고 소식은 생중계로 전해졌으며 일부 후보는 그 자리에서 유세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

 

유례없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투표는 경찰 및 헌병 인력 5만 명과 중무장한 군 병력 7000명이 동원됐으며, 파리7구 투표소엔 사설 경호 인력이 배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테러 위협은 선거 국면에 찬물을 끼얹기는커녕 오히려 투표 열기를 고취시켰다. 프랑스 남부 제르시의 경우 현지 시각 4월23일 정오 기준 투표율이 35%까지 치솟을 정도로 열기가 높았다. 최종 투표율은 77.8%를 기록했으며, 최근 치러진 10번의 전국 규모 선거 중 5번째로 높은 참여율을 보였다.

 

강경한 테러 대응을 주장해 온 우파에게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처음으로 우파는 결선 진출에 실패하는 뼈아픈 역사를 기록했다. 2002년 대선에서 결선 진출에 실패한 좌파 사회당의 전철을 밟은 것이다. 당시 사회당 후보였던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국민전선의 후보이자 이번 대선에서 결선에 진출한 마린 르펜 후보의 아버지인 장 마리 르펜에게 밀려 1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당시 극우 정당의 돌풍 앞에 집권 사회당 후보였던 브누아 아몽은 고작 6%대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쳤다.

이번 1차 투표 결과를 두고 가장 많은 논의가 이뤄지는 대목은 바로 ‘기존 정치 구조가 붕괴되는가’라는 부분이다. 결선에 오른 두 후보가 프랑스 정계를 양분하고 있는 좌파 또는 우파 정당 출신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공영방송 ‘프랑스2’의 정치 평론가 나탈리 생크리크는 1차 결과를 두고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폭발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속내를 뜯어보면 새로운 세대라고 자처한 대선후보들의 주변 인물 면면은 구세대 일색이다. 마크롱 후보의 경우 중도 우파 계열 프랑수아 바이루 민주운동당 대표를 비롯해 선거 막판에 합류한 로베르 휴 공산당 전 대표, 녹색당의 스타 다니엘 콘 밴딕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나이는 모두 65세 이상으로 수십 년간 프랑스 정치권에 머물던 인물들이다.

 

극우 정당 국민선전 마린 르펜 후보는 21.3%를 얻어 2위로 결선에 진출했다. © EPA연합


 

좌·우파 양당 구조 깨졌지만 구세대 일색

 

마린 르펜 진영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1차 투표 결과 발표 직후 연설에서 르펜은 “우리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정당”이라고 호언했지만, 우파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나탈리 코쉬스코 모리제 의원은 “르펜이 속한 국민전선은 자신들이 극우가 아닌 것처럼 화장을 하고 있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번 선거는 외부적인 상황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최악의 선거로 꼽히고 있다. 선거 내내 언론은 정책이나 공약에 대한 검증이 아닌 횡령 등 각종 혐의를 받아온 프랑수아 피용 후보에 대한 경쟁 후보들의 공격으로 도배됐다.

 

1차 투표 직후 탈락한 피용을 비롯한 거의 모든 정치인들은 “극우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며 마크롱 지지 의사를 천명했다. 5월7일로 예정된 2차 결선 투표를 앞두고 이제 남아 있는 마지막 변수는 5월3일 치러질 1대1 결선 토론이다.

 

지난 2002년 극우 정당의 장 마리 르펜 후보가 최초로 대선 결선에 진출했을 당시 상대 후보 자크 시라크는 결선 토론에 응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선에선 결선 투표를 앞두고 두 후보가 1대1 토론을 벌이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 극우 정당은 정상적인 정당 대접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며 정치권에서 “극우 정치인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사정이 다르다. 이제 프랑스에서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위상은 20% 이상의 지지를 꾸준히 받고 있는 정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마크롱 지지로 뭉친 반(反)극우 세력은 남은 1대1 토론에서 마크롱 후보가 어떻게 극우 정당 르펜 후보의 공격을 피하느냐를 이번 선거 마지막 관문으로 꼽고 있다. 실제 마크롱의 막대한 선거자금 사용이나 과거 근무했던 투자은행 로스차일드에서의 수입 의혹 등 아직 어떠한 검증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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