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생모 기리며 ‘어머니날’ 제정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5.08 14:27
  • 호수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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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Insight] 北 ‘어머니날’은 11월16일, ‘국제아동절’은 6월1일

 

가정의 달인 5월 평양의 분위기는 우리와 다르다. 어버이날이나 어린이날 같은 가족 관련 기념일이나 행사가 5월이 아닌 다른 달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2월 국방위원장 김정일 생일과 4월 국가주석 김일성의 생일 행사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쉬며 봄기운을 느껴보는 기간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가족 단위의 유원지·놀이공원 방문이나 식사자리가 좀 늘어나는 정도라는 게 탈북 인사들의 전언이다.

 

북한에 우리 같은 어린이날은 없다. 대신 매년 6월1일은 국제아동절로, 6월6일은 북한 소년단창립 기념일로 정해 놓았다. 국제아동절은 중국·러시아 등 사회주의권에서 치르는 어린이 관련 행사로, 1949년 9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민주여성연맹 회의가 매년 6월1일을 아동들을 위한 국제적 기념일로 제정한 데서 비롯됐다. 여성 관련 기념일은 3월8일 ‘국제부녀절’이 있다.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어버이날도 북한 달력에는 없었다. 김일성-김정일 가계(家系)를 우상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주민들이 진짜 자기 부모에 대해 감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날을 지정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판단일 것이란 얘기다. ‘어버이 수령’으로 상징되는 최고지도자에 대한 절대숭배와 함께 조선노동당을 ‘어머니 당’으로 비유하는 체제의 특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모습은 국가체제는 ‘사회주의 대가정’이란 개념으로까지 굳어졌다. 수령과 당과 대중이 삼위일체가 되는 가족 형태를 주장하는 것이다.

 

2016년 11월16일 평양에 위치한 4·25문화회관에서 북한 어머니날을 기념하는 공연이 열렸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5월 평양엔 ‘어린이날·어버이날’ 없다

 

이런 북한에 ‘어머니날’이란 이름으로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는 기념일이 등장한 건 2012년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집권 첫해인 그해 5월 열린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에 해당)에서 매년 11월16일을 어머니날로 지정했다.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1961년 열린 제1차 어머니대회에서 ‘자녀 교양에서 어머니들의 임무’라는 주제로 연설한 날을 기념해 날짜를 정했다.

 

김정은이 집권하자마자 어머니날 제정을 서두른 배경을 두고 생모 고용희(지금까지 고영희로 알려졌으나 미국으로 탈북 망명한 동생 고용숙의 증언 등으로 본명이 고용희인 것으로 파악)에 대한 각별한 애착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김정은은 10대 시절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 유학했다. 6년 정도 해외에서 조기유학 생활을 하던 김정은으로서는 평양에 머물던 생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을 수 있다. 고용희는 김정은이 20살 나던 2004년 유선암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치료 중 숨졌다.

 

어머니날 제정이 이뤄진 2012년은 김정은이 병마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기리며 평양에 유선종양연구소를 한창 건립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노동신문은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집권한 김정은이 이듬해 2월 북한의 대표적인 산부인과 병원인 평양산원 내에 유선종양연구소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했다. 건축면적이 1974㎡에 이르는 연구소엔 유선촬영실, 항암치료실, 수술실 등 현대적 시설이 갖춰졌다. 이 연구소 건립은 김정일의 유언이기도 했다는 게 북한 매체들의 보도다. 김정일이 사망 한 달 정도를 앞두고 김정은에게 간곡한 당부를 했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어버이날이 아닌 어머니날로 정한 건 남한이 이미 선점해 놓은 이름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이기보다 미국 등 서방 각국에서 기념하는 ‘마더스 데이(Mother’s Day)’를 떠올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의 경우 1956년부터 어머니날을 제정해 기념해 왔고, 1973년 들어 아버지에 대한 은혜도 함께 생각하자는 취지에서 어버이날로 이름을 바꿨다.

 

미국의 경우 아나 자비스라는 여성이 1907년 모친의 2주기 추모식 때 흰색 카네이션을 참석자들에게 건네주며 어머니날 제정을 주창한 게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제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은 1914년에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공식 제정했다.

 

 

김정은, 생모 묘지에 카네이션 바칠까

 

조기유학을 통해 서방 세계의 이런 풍습을 접했을 김정은도 어머니날과 카네이션의 연관성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첫 번째 어머니날을 앞두고 2012년 9월 평양화초연구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어머니날에 꽃을 사다가 어머니나 아내에게 주면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어머니날엔 꽃을 선물하는 게 주민들 사이에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꽃은 카네이션과 장미라는 게 북한 매체들의 보도다. 최근 들어선 화장품에 대한 선호도도 높아져 어머니날 선물로 인기몰이를 한다는 얘기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어머니날 제정 다음으로 김정은이 생모 고용희와 관련해 어떤 행보를 펼칠까 하는 점이다. 본격적인 우상화에 언제 나설까 하는 건 초미(焦眉)의 관심사다. 생모를 북한 주민들의 어머니로 치켜세우는 문제는 김정은 자신을 ‘수령’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가계우상화 코스다. 앞서 조심스러운 시도가 있었다. 김정일 장례를 치른 지 보름 남짓한 2012년 1월 북한 관영 조선중앙TV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독서지도를 받는 김정은의 사진을 공개했다. 고위 간부들에게는 고용희의 육성과 영상이 담긴 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을 비공개리에 관람토록 한 일도 있다. 노동신문에 생모를 ‘평양의 어머니’로 묘사한 찬양 글을 실은 것도 이때쯤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고용희가 주민들 사이에서 ‘째포’라 불리며 멸시받던 재일동포 출신이란 게 결정적 걸림돌이다. 1952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 고용희는 10살 때 만경봉호를 탄 북송 재일교포다. 조총련 간부 출신인 아버지 고경택이 일제 시대 육군성이 관할하는 히로타 군복공장 간부로 일한 경력은 치명적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벌였다며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있는데, 정작 이를 토벌하던 일본군의 군복을 만들어준 게 며느리 고용희의 부친이란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주민들에게 입소문이라도 나면 우상화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김정은은 8월 백두산과 평양에서 이른바 ‘백두산위인 칭송대회’를 열겠다는 계획이다. 김일성·김정일과 함께 고용희를 어떤 반열에 올리려 할지가 핵심 관전 포인트다. 오는 11월 어머니날에 김정은이 생모의 묘지에 카네이션을 바치는 장면이 북한 TV에 공개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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