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참여는 희망의 촛불’ 문구 허용 ‘촛불의 힘! 투표의 힘!’ 불허, 왜?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7.05.08 19:53
  • 호수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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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들, 유권자 손발 묶는 선거법 독소조항 개정 강하게 요구

 

‘촛불’이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 ‘금지 단어’가 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촛불’이란 단어가 포함된 투표 독려 현수막 일부를 걸지 못하게 막아선 것이다. 촛불이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반대하는 내용’이라는 이유에서다. 제재의 근거가 된 공직선거법 58조의 2(투표참여 권유활동)에는 ‘누구든지 투표참여를 권유하는 행위를 할 수 있지만 특정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해선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이에 대해 “촛불로 시작된 조기대선에서 촛불이란 단어를 못 쓰게 막는 건 아이러니”라는 비판이 나온다.

 

대전 지역 시민단체 ‘국민주권실현 적폐청산 대전운동본부’는 투표를 열흘 앞둔 4월29일부터 대학가에 투표를 독려하는 현수막을 내걸 계획이었다. 문구는 ‘촛불이 만든 대선, 미래를 위해 투표합시다’ ‘투표가 촛불입니다. 죽 쒀서 개 주지 맙시다’ 등이었다. 그러나 이내 대전 선관위로부터 공직선거법 58조를 근거로 현수막 게시를 금지한다는 공문이 날아왔다. 이기동 대전운동본부 국장은 “해당 문구를 특정 정당에 대한 유·불리로 해석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선거 후 선관위를 상대로 가처분신청 등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3월15일 ‘민의를 반영하는 선거법 개혁 공동행동’ 회원들이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참석자들은 탄핵 이후 첫째 과제로 선거법 개혁을 주장했다. © 연합뉴스

 

비슷한 시기 서울 종로에 위치한 흥사단 건물에 걸린 ‘촛불이 앞당긴 선거, 투표참여로 꽃피우자’ 현수막도 문제가 됐다. 김전승 흥사단 사무총장은 “촛불이 왜 안 되는지 선관위에 문의했더니 ‘촛불과 태극기를 비교해 생각해 보면 되지 않느냐’고만 하더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선관위는 “촛불, 태극기 모두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나 표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촛불’ 문구 허용·금지 사례를 들어가며 부연설명을 했다. 예시에는 ‘투표참여는 희망의 촛불’ 등이 허용 문구로, ‘촛불의 힘! 투표의 힘!’ 등이 금지 문구로 제시됐다.

 

우리나라 공직선거법은 17개 장, 279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선거운동과 관련된 내용이 담긴 7장에는 선거 기간 중 해선 안 될 행동을 51개 조항으로 세세히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또 기준도 모호해 선거 때마다 유권자를 꼼짝 못하게 하는 ‘독소조항’으로 꼽히고 있다.

 

‘촛불’ 단어를 금지한 선거법 58조와 함께 가장 문제시되는 조항은 93조 1항이다. ‘누구든지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특정 정당·후보자를 지지·반대하는 내용이나 정당 명칭 또는 후보자 성명을 나타내는 인쇄물 등을 배포·게시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1994년 공직선거법 제정 당시 함께 만들어진 이 조항은 줄곧 개정 1순위로 꼽혀왔다. 또한 금지된 인쇄물 내용을 그대로 인터넷에 올릴 경우 법에 저촉되지 않는 빈틈도 존재해 ‘모순투성이 조항’이라는 지적도 받고 있다.

 

이번 대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4월15일 촛불집회에서 청소년인권단체 ‘인권친화적학교+너머운동본부’(너머본부)는 청소년 인권 정책에 대한 후보별 입장이 담긴 인쇄물 배포를 중단해야 했다. 배포 시 고발하겠다는 선관위 제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머본부는 인쇄물 제작 전 후보별로 청소년 정책에 대해 100점 만점의 점수를 매기는 방식을 취하려다 선거법 위반을 우려해 O·△·X 표시 방식으로 바꿔 제작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인쇄물에 후보의 얼굴과 이름이 실렸다며 선거법 93조 1항 위반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고유경 너머본부 활동가는 “후보의 이름이나 얼굴을 넣지 않고 어떻게 정책을 알리라는 건지 모르겠다”며 “제재만 하고 대책은 알려주지 않으면 이건 유권자에게 정책 고민은 하지 말고 표나 달라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같은 날 환수복지당 당원 2명이 사드 배치에 찬성하는 후보들의 얼굴을 포스터에 실었다는 이유로 현행범으로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연행된 이의선 인천시당 사무처장은 “체포 당시 경찰로부터 어떤 법 위반인지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다”면서 “선거 후 선관위를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정식 고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선관위는 ‘촛불’이 특정 후보와 정당을 반대하는 내용이라며 게시 불가 결정을 내렸다. © 참여연대

 

“표만 주고 정책엔 관심 끄라는 건가”

 

과도하게 엄격한 법조항으로 애꿎은 유권자들이 대선 후 범법자로 낙인찍히는 일은 오랫동안 반복돼 왔다. 2010년 6·2 지방선거 당시 배옥병 친환경 무상급식 국민연대 상임위원장은 후보들에게 무상급식 공약을 요구해 선거법 93조 1항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년 넘게 진행된 재판에서 배 위원장은 벌금 200만원형을 선고받았고 5년간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배 위원장이 소속된 단체는 2002년부터 똑같이 정책요구를 해 왔지만 2010년 이전 선거에선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당시 선관위는 “정책이 ‘쟁점화’됐고 특정 정당에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배 위원장은 “그때그때 자의적으로 판단해 버리는 선관위 태도로 인해 ‘정책 선거’가 아닌 ‘묻지마 선거’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직접적 피해뿐 아니라 선거 기간 중 인터넷에 올린 게시물들이 선관위에 의해 삭제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지난해 4·13 총선 기간 중 선관위가 삭제한 인터넷 게시물이 1만7000건에 달했다. 여론조사 공표·후보자 비방 등 사유는 다양하다. 참여연대는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막아 유권자를 선거의 주인이 아닌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선관위의 권한 남용을 비판했다.

 

2014년 유권자 표현의 자유 보장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한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선관위가 헌법기관으로 지정된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며 “선관위가 구시대적 규제와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헌법에 보장된 선거운동 자유를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후 선관위 권한 남용을 막고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코미디 같은 선거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선거철마다 등장했던 선거법 개정 논의는 선거 이후 급속도로 잊히는 바람에 그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따라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이번에야말로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참여연대를 비롯해 200여 개 시민단체가 모여 ‘민의를 반영하는 선거법개혁 공동행동’을 출범시켜 “대선 후에도 선거법 개정을 위한 행동을 이어가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장소화 참여연대 간사는 “선거가 끝나면 당선된 정치인들은 국민의 기본권에서 이 문제를 보지 않고 선거에서의 유·불리만 따져왔다”면서 “풀뿌리 단체들이 먼저 나서 선거법 독소조항 폐지에 대해 국회에 제안하는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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