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 “블랙리스트로 억압하는 유치한 만행 없는 시대 열어야”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7.05.09 13:57
  • 호수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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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문학계 거목 고은 시인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고질적 실정 청산하는 게 새 정부 임무”

 

한국을 대표하는 참여 시인이자 한국문학계의 원로인 고은 시인. 그는 과거 민주화운동의 중심부에 서서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와 전두환의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시를 쓰다 많은 고초를 겪었다. 최근에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세월호 참사 후 ‘이름 짓지 못한 시’로 추모와 분노의 심경을 전했고, 국민들이 움직인 촛불을 ‘역사의 절정’이라 표현했다.

 

지난해 공개된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과거에 국한됐다고 여겨졌던 문화 탄압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감시와 탄압에 익숙했던 고은 시인은 블랙리스트가 공개됐을 때 “새삼스럽거나 낯설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도 군부정권의 행태가 계속되는 것에 대해 ‘구역질이 나는 정부’라고 일침을 놓았다. “한 번도 국민이 돼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시대를 작품 속에 녹여온 한국문학의 거목, 고은 시인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새 정부가 해결해야 할 미래의 과제에 대해 짚어봤다.

 

ⓒ 사진=연합뉴스

1930년대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역사의 산증인이자, 그 시간 동안 근현대문학을 지켜온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인 고은’을 만든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내가 태어난 1930년대는 나에게 ‘우연의 시대’다. 공교롭게도 나는 한말의 어느 해 태어나지도 않았고, 1940년대 후반 식민지에서 해방된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이 우연으로 내가 태어난 1930년대 초반은 나에게 ‘필연’이 됐다. 1930년대는 일제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연대기에 해당한다. 내가 원한 바도, 원치 않은 바도 아닌 전시 식민지 체제 속에서 식민지 원주민들은 점차적으로 시대의 객체가 돼갔다. 이런 비상(非常)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이했고, 해방시기의 난세와 분단고착의 38선 시대, 1950년대 한국전쟁의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 여러 정부를 경험했다.

 

이승만 독재를 쓰러뜨린 4월 혁명, 그리고 다시 4월 혁명을 쓰러뜨린 5월 쿠데타를 거쳐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을 살았다. 또 그것의 잔재인 전두환 신군부 체제가 들어서며 1980년 광주항쟁이 발생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지나고 박근혜의 파국까지, 정치적 연속극의 치욕적인 시간을 나는 살아왔다. 그러나 나의 삶은 역사의 종속물이 아니다. 나의 삶은 내가 개척하는 ‘역사의 익명성’을 획득하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 때도 일명 ‘블랙리스트’ 대상이었다. 지금은 금서, 검열 등의 단어가 익숙하지 않은 시기지만, 블랙리스트라는 단어는 익숙하게 오르내리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한국 현대사의 여러 모순을 집약한 시대라고 본다. 인권 문제나 단순한 민주주의의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의 운명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주도한 살생부의 우선순위 한 명으로 등재됐다.

 

이후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로부터 내내 밀착 감시를 받았고, 투옥, 수색, 유폐 등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것은 블랙리스트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탄압은 나의 저항 의지를 약화시킬 수 없었다. 노자는 ‘진리는 반대와 같다(正言若反)’고 말했다. 나는 금서, 검열, 또 최근 논란이 됐던 블랙리스트라는 단어에 한 번도 놀라워하거나 위축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런 탄압의 문화정책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문화예술인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시인의 위엄을 자주 의식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을 거부할 때가 있다. 물론 수구파의 적폐나 기득권에 대한 가차 없는 청산을 위한 지속적 민주화나 자주화는 내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합치한다.

 

 

새 정부에 바라는 문화정책은 무엇인가.

 

19대 대통령과 그 정부가 탄생한다면 더 이상 블랙리스트 따위로 문화예술인들을 억압하는 유치한 만행이 없기를 기대한다.

 

 

세계적으로 선생님의 시가 읽히고 있다. 중국 당 기관지 인민일보 필진으로 초청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드 사태 이후 변화가 있었나.

 

내 시는 30여 개 국어로 번역됐다. 포르투갈이나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스페인 지방, 알프스 산중, 아프리카에도 독자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내 시는 보편성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내 특수성이 세상의 다른 특수한 상황과 만나는 교감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해방 70주년이 되기 몇 해 전, 한반도 통일 문제를 다룬 내 논설을 실은 적이 있다. 이후 중국에서 네 번째 중국어판 시집이 나오기로 했었는데, 사드 사태가 불거지면서 중지된 것은 사실이다. 언젠간 풀릴 것이다.

 

 

한 시대에서 문학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나.

 

문학의 역할은 시대가 부여하지만, 어느 때는 문학으로부터 시대의 정체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장 효용주의’ 왕국에서 문학의 임무는 1차적일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마그마는 지하에서 언제 불덩어리를 터뜨릴지 모른다.

 

 

1986년부터 2010년까지 4001편의 시로 구성된 30권짜리 연작시 ‘만인보’에 담긴 고영태 전 블루케이 이사의 부모 이야기 등이 알려지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나는 내 시 만인보의 인물 중 어떤 인물만이 엽기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굳이 바라지 않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낸 ‘촛불집회’에 대해 11월 혁명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새 정부를 앞둔 상황에서 이 같은 국민들의 움직임을 어떻게 보나.

 

촛불혁명은 명예혁명이다. 박근혜라는 여중 3년 정도의 미성년자에게 박정희라는 유신의 망령을 씌운 허수아비에 속았다는 치욕, 그 전방위적인 국정 농단이 온 세계에 하나하나 폭로되는 치욕을 국민들이 영광스럽게 이겨낸 명예혁명이다. 나는 이 혁명, 피 한 방울이나 돌멩이 하나 없이 촛불 하나만으로 이룩한 이 ‘꽃의 혁명’이야말로 세계 혁명사에 없는 명예라고 생각한다. 나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극찬하는 대상이 바로 ‘촛불’이다.

 

 

한반도 외교 정세가 위기에 빠져 있다. 지금까지의 외교에 대해 평가한다면.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한국은 사실상 외교가 없었다. 소위 위안부 협정, 사드 협정 문제도 무엇 하나 성공한 것이 아니다. 하나같이 실패한 것이다. 그런 외교의 실종은 현재 우리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1960년대 체결한 굴욕의 한일외교는 그 수명이 길어지면서 지금껏 전후 일본의 야망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 외교의 현해탄 체질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의 외교 실태와 새정부의 해결 방안을 짚어본다면.

 

현재 한반도는 남한의 경우 얼핏 보면 1960년 4월 혁명 이후가 겹쳐지는 비상시국이다. 박근혜 몰락 이후 정국은 이승만 물락 이후와도 유사하다. 그래서 나는 새 정부가 제2공화국의 취약성을 넘어서는 강렬한 정치 역량을 발휘하기 바라는 것이다. 한반도를 에워싼 국제 역학관계에 대해서도 미국·일본과 중국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등거리 체제를 쌓을 것인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본다.

 

새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의 고질적인 내우외환의 실정(失政)을 청산할 무거운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새로운 국내외적 진로를 개척해야 한다. 우선 꽉 막힌 북한의 극단주의를 유연하게 만들어야 하고, 북방 대륙과의 소통도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현실화해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가 유라시아의 출발점이라는 ‘도달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대륙의 세계성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국내와 국제 문제가 항상 맞닿아 있다.

 

 

새 정부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

 

새 정부는 먼저 과체중의 하중(荷重)을 조절하길 바란다. 정부는 정부대로 전횡한 국가권력을 분산시킬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기주의를 내세우기보다 시대가 부과한 정의를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실행해 나갈지를 집중적으로 고민하는 정치적 이성과 시민의식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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