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폴리테이너들은 너무 피곤하다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5.18 14:58
  • 호수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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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참여 연예인들 오히려 더 위축…대중적 영향력 커진 만큼 대가도 치러

 

‘폴리테이너(politainer)’라는 말은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슐츠가 1999년에 발표한 논문 ‘벤투라와 새로운 세계의 용감한 폴리테이너 정치학’에서 처음 쓰였다. 미네소타주 주지사 선거에서 프로레슬러 출신인 벤투라가 승리하자, 이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신조어다. 정치인(politician)과 연예인(entertainer)의 합성어로 정치활동을 하는 연예인을 뜻한다. 데이비드 슐츠는 영상매체 때문에 연예인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한국에서 폴리테이너는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연예인도 물론 포함하지만, 정치적 의미가 담긴 사회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데이비드 슐츠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에선 연예인의 당선 가능성이 그리 높진 않다. 그러나 발언의 사회적 파급력이 상당히 커서, 웬만한 초·재선급 국회의원보다도 더 큰 주목을 받는다.

 

2016년 11월19일 가수 전인권씨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4차 범국민행동’에서 공연하고 있다. © 뉴스뱅크이미지

 

“정치판에서 연예인을 이용만 하려 들었다”

 

최근 대선 국면에서 폴리테이너들이 또다시 화제에 올랐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폴리테이너의 활약이 예년에 비해 그리 큰 건 아니었다. 대중과 매체는 폴리테이너에 주목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연예인들이 앞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폴리테이너의 활동이 저조하다는 이슈가 화제가 되면서 폴리테이너가 다시 조명됐다.

 

과거 연예인은 정치권의 이용 대상으로, 연예인의 정치적 행동은 권력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이뤄졌다. 이승만 정부 당시엔 정치깡패 임화수가 권력이 연예인을 이용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는 반공예술인단으로 연예인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했고, 한편으론 여배우를 상납했다고 전해진다. 희극인 김희갑이 일방적으로 반공예술단 공연 일정을 발표해 버린 임화수에게 한마디 했다가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질 정도로 맞은 사건은 유명하다. 당시 김희갑이 “최무룡·김진규 등 임화수에게 안 맞은 사람이 없다”고 호소해 여론이 들끓었지만, 바로 한 달 후 임화수는 영화인들의 추대로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직에 오른다. 연예인들이 정치권력 앞에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연예인 동원 문화는 여전했다. 한 연기자가 “집권당 선거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연예계 활동에 제약이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선거운동에 참여해 집권당 후보를 지원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른바 ‘관제(官製) 폴리테이너’였던 셈이다. 비협조 연예인에겐 보복이 가해졌다. 신중현이 박정희 대통령 찬가 제작을 거부한 후 그의 노래들은 금지곡이 됐다. 그에 대한 반발로 신중현이 만든 노래가 《아름다운 강산》인데, 지난 연말 ‘탄핵 반대’ 집회에서 이 노래를 부르자 신중현의 아들인 신대철이 아버지의 뜻을 모독했다며 촛불집회에 나와 《아름다운 강산》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후 연예인들이 국민적 인기를 얻으면서 권력은 단순 동원 차원을 넘어서서, 연예인을 일종의 정치적 ‘얼굴 마담’으로 이용하려 한다. 연예인 국회의원을 만들려 한 것이다. 연예인 입장에서도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이 컸다. 당시 아무리 연예인이 국민적 인기를 누린다고 해도 사회적 위계상으로는 천대받는 직종이었다. ‘금배지’는 그런 설움을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인생역전의 기회였다. 권력과 연예인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 의원직에 도전하는 폴리테이너가 줄을 잇는다.

 

2009년 12월21일 국회 연구단체인 ‘대중문화&미디어 연구회’ 행사에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방송인 김미화씨가 방명록을 남기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배우 홍성우가 공화당 의원으로 첫 연예인 국회의원에 올랐고, 민정당을 거치면서 3선까지 성공했다. 바로 뒤이어 배우 이대엽이 3선에 이어 한나라당 소속으로 성남시장까지 올랐다. 이외에도 이낙훈·최무룡·이순재·최불암·강부자·정한용·강신성일·신영균·이주일·최희준 등 많은 연예인들이 국회에 입성했다. 이선희는 갑자기 민자당 소속 서울 시의원에 나서기도 했다. 여당인 민자당이 선거판 바람몰이를 위해 이선희를 ‘차출’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연예인들이 폴리테이너로 정치판에 들어갔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책적 역량 없이 그저 ‘얼굴 마담’ 노릇이나 하거나, 본인의 명예욕만 채운다는 인식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소수 이외엔 대중적 인지도에 비해 정치적 존재감이 극히 미미했다. 이주일·강부자·이순재 등은 “정치판에서 연예인을 이용만 하려 들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연예인의 정치참여가 다른 식으로 분출한다. 기존의 금배지 도전이나 권력에 의한 동원이 아닌, 자발적인 후보 지지 운동의 형태다. 2002년 대선 때 명계남·문성근·김흥국 등이 노무현 진영과 정몽준 진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명계남과 문성근은 ‘노빠’의 상징으로 불릴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외에도 주로 영화계 인사들이 대거 민주당이나 민노당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렇게 연예인들의 정치적 역할이 커지자 보수 진영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2007년 대선 땐 백일섭·이덕화·이용식·이종원·서인석 등이 이명박 진영에 힘을 보탰다. 유인촌은 이명박 정부에서 문체부 장관에 올라 보수 폴리테이너의 상징이 됐다. 2012년 대선 땐 진보 성향 연예인과 보수 성향 연예인이 전면전을 벌였는데, 특히 100명이 넘는 연예인 유세단이 나타난 박근혜 진영이 주목받았다.

 

2016년 11월12일 가수 이승환씨가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본격적인 폴리테이너 시대와 탄압

 

이렇게 연예인들의 정치적 활동이 점점 활발해진 건 군사정부가 끝나고 민주화가 됐기 때문이다. 독재 시절엔 연예인이 민주당 계열을 감히 지지할 수 없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박규채가 1987년 대선 때 김영삼 지지 선언을 하자마자 즉시 방송에서 하차당했을 정도로 분위기가 삼엄했다. 그랬다가 김대중 정부를 거치며 연예인들에게 자신감이 생겼고,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자발적 폴리테이너 현상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때 다시 권위주의적 기조가 나타나자, 반발심이 폭발했다. 광우병 촛불집회 등을 거치면서 정치적 발언이 잇따른다. 꼭 특정 정당 지지가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확대돼 폴리테이너가 소셜테이너로도 불리게 된다. 신해철·이승환·김제동 등이 소셜테이너의 상징으로 대두했다. 이외에도 쌍용자동차 노조 지지 발언을 한 이효리, MBC 노조를 지지한 문소리 등 다양한 활동이 나타났고, 대중의 호응도 컸다. 그렇게 연예계의 비판적 사회참여 열기가 커지자 박근혜 정부는 블랙리스트로 응수했다. 단지 《변호인》에 출연했을 뿐인 송강호까지 배우 활동에 제약을 받을 정도로 ‘우악스러운’ 방식이었다. 잘나가는 MC였던 김제동은 지상파에서 거의 사라졌고, 진보 성향으로 알려진 김여진이나 김미화도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문성근과 명계남은 배우 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SNL코리아》로 정치풍자 코미디를 했던 CJ는 된서리를 맞았다.

 

공포 분위기가 연예계를 짓눌렀다. 평소 비판적 정치활동을 거의 안 했던 차인표까지 촛불집회에 참여할 정도로 지난 연말 연예계의 사회적 발언이 잇따른 건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때 짓눌렸던 분위기 속에서 연예인들은 확실히 위축됐다. 섣불리 나섰다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번 대선에선 연예인의 활약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민주화 후퇴의 징후라고 볼 수 있다.

 

 

네티즌 여론 위협도 폴리테이너 위축의 한 요인

 

민주주의 선진국인 미국에선 연예인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정치활동에 나선다. 로널드 레이건, 아놀드 슈워제네거,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이 각종 선출직을 맡는 등 거침이 없다. 블랙 아이드 피스의 윌 아이 앰, 스칼렛 요한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많은 연예인들이 민주당 지지를 표명했다. 전통적으로 할리우드는 민주당 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그렇다고 공화당 정권이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숀 펜은 공화당 부시 대통령에게 “악마이자 벙어리 같은 존재”라는 극언을 하기도 했다. 록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운동까지 펼친다.

 

이번 미 대선에서도 트럼프는 미국 연예계의 ‘동네북’이 되다시피 했다. 마돈나, 메릴 스트립 등 트럼프 반대 발언을 한 연예인을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특히 《SNL코리아》 정치풍자 코너가 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에선 폐지된 반면, 미국 《SNL》에선 알렉 볼드윈 등이 작정하고 트럼프를 조롱했다. 이에 트럼프가 적극적으로 응수하면서 양 진영은 말싸움을 벌였다. 싸움은 대등할 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이 조용히 연예인들을 억누르지만, 미국에선 대놓고 권력과 연예인이 싸운다. 그래도 불이익은 없다. 이런 민주적 환경에서 폴리테이너 문화가 꽃피는 것이다.

 

TV 프로그램 《SNL코리아》의 정치풍자 코너의 한 장면 © tvN

한국에서도 젊고 자유분방한 연예인들이 보수 노선을 비판하면서 진보 성향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건 보수보다 혁신을 추구하는 예술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미국에선 그러려니 하는데, 우리네 경우는 지난 보수 정권 10년 동안 ‘문화계를 종북세력이 장악했다’면서 과민반응을 보였다. 《변호인》 제작자는 한국영화계에서 설 곳을 잃고 결국 외국계 영화사로 옮겼다. 송강호는 《변호인》 섭외에 향후 정치보복을 우려해 망설이다가 부인의 조언으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한편, 최근 들어선 정치권력뿐만이 아니라 네티즌 여론까지 위협으로 대두됐다.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편 가르기 문화가 득세했기 때문이다. 연예인 입장에선 네티즌 눈치 때문에라도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워졌다. 정치권력이든 네티즌 여론이든 그 어떤 이유로도 정치활동에 제약이 있어선 안 된다. 모두에게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정치활동의 권리가 있다는 것이 민주공화국의 원리다. 폴리테이너가 자유로운, 관용적인 나라가 돼야 국민이 누리는 자유도 커질 것이다. 물론 연예인도 영향력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 인기에 영합하거나 일시적인 감정으로 정치선동에 나서는 걸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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