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경시 풍조 우려…인문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 키워내야”
  •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 승인 2017.06.2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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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마르티나 도이힐러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

 

“편하게 한국말로 인터뷰하시죠.”

 

머뭇머뭇 영어로 인사를 건넨 기자에게 단호한 말투의 답변이 돌아왔다. 백발에, 푸른 눈을 한 스위스의 원로학자는 이후 한 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100% 한국말로 소화했다.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 억양이 느껴지는 말씨였지만, 인터뷰 내내 언어로 인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영국 런던대 SOAS 명예교수를 만났다. 구미 한국학계의 원로인 그는 6월26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KF(한국국제교류재단) 특별라운드테이블’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KF가 마련한 특별라운드테이블은 아시아학 관련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북미아시아학회(AAS)가 아시아 지역에서 개최하는 대규모 학술대회 ‘AAS Asia’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고등학교 때 스위스에서 우연히 중국 명나라 회화 전시회를 갔다가 동아시아 역사에 매료된 후 50년이 넘도록 동아시아 ‘한 우물’만 팠다. 많은 서구의 한국학자들이 그렇듯 중국에서 출발한 학자의 관심은 한국으로 귀결됐다.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에서 중국과 일본 고전 연구를 하던 그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한국의 개항, 1875-1884년”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여말선초 사상․사회시스템의 변화와 조선시대 유교문화에 대한 연구로 학문적 영역을 넓혀갔다. 2003년 한국에도 번역돼 나온 그의 저서 《한국의 유교화 과정》(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은 유교 사상이 조선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서술한 학술 서적으로 서점가 스테디셀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올해로 82세, 도이힐러 교수의 학자로서의 철학은 분명하고 완고해보였다. 무엇보다 ‘역사 연구’라는 주제에 대해선 타협하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그는 최근의 역사교육 경시 풍조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학의 트렌드가 과거 문사철(문학․역사․철학) 위주에서 한류․정치구조․기술개발 연구 등 사회과화적인 방향으로 집중되는 추세에 대한 우려도 잊지 않았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영국 런던대 SOAS 명예교수 ⓒ 시사저널 최준필

 

‘역사’를 계속해서 강조하시는데, 왜 역사를 알아야 하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전혀 어렵지 않다. 역사란 것은 우리 문화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바닥이 없는 건물, 근본이 없는 생물은 의미가 없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현대사라 하더라도 지나간 역사에 대한 이해 없인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 ‘현재’는 꾸준히 과거와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지만, ‘현재’를 이루고 있는 문화의 바탕으로서 과거 역사의 연구는 중요하다. 

 

최근 한국에서 보이는 ‘역사 경시 풍조’는 그런 점에서 우려스러운 일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나의 모국 스위스에서도 겪고 있다. 스위스는 교육제도는 잘 돼있지만 학생들이 역사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최근의 한국학 연구 트렌드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다.

 

한국학 트렌드가 문화․역사․철학에서 주로 사회과학쪽으로 많이 옮겨가고 있다. 한국 영화나 한류, IT에 대한 연구는 물론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국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외국에선 한류에 대한 흥미에서 시작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학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관심은 1년이면 쉽게 사라져버린다. 차세대 한국학자를 키워내기 위해선 피상적 관심에서 인문학적 관심으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통적 의미의 인문학적 연구에 대한 관심을 도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한국학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하는 말씀인 것 같다. ‘본격적인’ 한국학자를 키워내기 위한 기존 한국학자들의 책무가 결국 한국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교육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한국학은 결코 쉬운 학문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학이 지니는 특수성 때문이다. 

 

바로 언어다. 한국학을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 익숙해져야 할 언어가 많다. 일단 반드시 한문을 알아야 한다. 여전히 한국말의 50% 가까이는 한문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과거엔 더 심했다. 내가 처음 한국에 왔던 1967년엔 신문이며 길거리 간판 등 일상적인 영역에서도 한자의 사용이 빈번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를 거치며 일본어의 잔재도 남았다.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 등에서 발간한 자료들도 많다. 일본어도 필요하다. 

 

현재 중학교에서 900자, 고등학교에서 900자 모두 1800자의 기초한자를 가르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학생들은 한문을 중요하게 여기질 않는 것 같다. 역사 교육과 더불어 한문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 꾸준히 고취시키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선시대 유교 사상을 연구해오셨다. 현대의 한국에서 유교사회의 흔적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고 보시나.

 

흥미로운 것은 ‘유교국가’로서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내부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점이다. 외국에선 여전히 한국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교적인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의 한국인들의 사고 속에 유교문화가 얼마나 있을까. 

 

조선시대에 유교는 사회시스템이자 종교였다. 지금의 한국에선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유교사상의 피상적 흔적은 남아 있다. 웃어른을 대할 때 공손하게 대한다거나, 자리를 양보한다거나. 하지만 실질적 규범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젊은 한국인 가운데 ‘공자’가 누구인지, 유교 사상적 특징은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 시사저널 최준필

 

교수님께선 2009년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조선시대의 중요 고문서 20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1967년 규장각에서 연구하던 시절, 서울 명륜동에 하숙하면서 당시 인사동 헌책방을 많이 드나들었다. 지금의 인사동에선 헌책방이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만해도 인사동이 헌책방 메카였다. 또 거의 매일 ‘골동품 아저씨’가 규장각으로 와서 오래된 책이나 편지 같은 걸 팔기도 했다. 주로 조선시대 양반들이 읽던 고서(古書)나 그들이 주고받은 서한(書翰)을 샀다. 연구생 신분으로서 재정적으로 풍족하진 않았기 때문에 많이 수집하진 못했다. 

 

2009년 기증했던 건 추사 김정희의 ‘홍패(紅牌)’였다. 과거시험 합격증이다. 내가 갖고 있던 것 중에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당시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던 ‘일성록’을 뒤져가며 연구했다. 그땐 일성록이 아직 국보 지정이 되기 전이라 여느 책을 보듯 직접 책장을 넘겨가며 봤었던 기억이다.  몇 년 후 국보로 지정됐다. 

 

 

1960-70년대에 수집한 자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겠다.

 

1973년에서 2년 간 있었을 시기, 경상북도와 충청도 지역 마을로 현지조사를 다녔다. 한국의 유교적 조상숭배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제사나, 농제(農祭)에 많이 갔다. 그 때 사진을 많이 찍었다. 

 

당시만 해도 카메라를 가진 사람이 많이 없었을 때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가면 한국인들이 많이 신기해했다. 카메라를 구경하기 위해 멀리에서부터 오기도 했다. 그때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사진 찍히는 걸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이 생전 처음 보는 물건에 귀신이 있는건 아닌지 두려워했던 것 아닐까 싶다.

 

당시 유교적 제사에 여자들은 참석하지 못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나는 외국인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참석을 허락받았다. 물론 제사에 액티브하게 참여한 건 아니고 관찰자로서 말이다. 

 

최근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해보니 2300여장이더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스위스 취리히대학 민속박물관과 한국 민속박물관 등에 기증하고자 한다. 

 

 

그때와 지금, 한국이 많이 변했다. 실감하겠다. 

 

한국은 19세기말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이, 빠른 속도로 변해왔다. 이럴수록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조선시대엔 양반만 살았던 게 아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한국의 민속박물관 등에 가보면 주로 양반계급이 사용했던 유물들이 전시돼있다. 농기구 같이 평민들이 사용했던 유물들도 있고 최근 들어선 양반 이외의 계급에 대한 조명도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조선시대 유물 전시’라고 하면 양반 신분 위주다. 그런데 전시물 설명서엔 해당 유물이 어느 계급에서 사용하던 건지 적혀있질 않다. 그것이 양반이 쓰던 물건인지, 평민이 쓰던 건지, 아니면 노비가 쓰던 건지, 사용주체에 대한 기술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부분까지 세밀한 주의를 기울여 역사를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 

 

ⓒ 시사저널 최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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