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엔 계층도 계급도 없다” 가장 평등한 언어 ‘에스페란토’
  •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 승인 2017.07.2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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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에스페란토 전도사’ 이영구 명예교수, 세계에스페란토대회 한국서 23년만에 개최

 

“Bonvenon al Koreio!(봄베논 알 코레이오)”

“Dankon!(단콘)”

 

로마자를 써놓은 그대로 읽어내린 발음. 라틴어 같기도 하면서 독일어 같기도 하면서 스페인어 같기도 한 단어. 어느 나라 말일까. 

 

‘한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의미하는 두 문장은 ‘에스페란토(Esperanto)’다. 10만 여명의 세계인구가 사용하는 언어 에스페란토는 인위적으로 만든 언어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사용자를 자랑한다. 폴란드 출신 러시아 의사였던 자멘호프 박사가 1887년 발표한 이 언어는 단순한 문법과 조어 방식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언어 사용에 있어 창시자의 ‘저작권 영구 포기’ 선언으로 발표 즉시 세계적으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희망하는 사람’이란 뜻인 ‘에스페란토’는 자멘호프 박사가 이 언어를 발표할 때 사용한 필명이기도 했다. 에스페란토는 단순한 언어를 뛰어넘어 언어를 통한 세계 평화 운동이다.” 

 

이영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는 자칭 타칭 ‘에스페란토 전도사’다. 대학 시절 처음 에스페란토를 접했다.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구분도, 계급도 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이 언어의 철학이 그의 가슴을 쳤다. 그 후로 전공인 중문학과 함께 에스페란토에 대한 공부를 이어왔다. 지난 2월 36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년퇴임을 한 그는 다음 학기에도 여전히 교양강좌 ‘에스페란토의 이해’로 학생들을 만날 예정이다. 그가 지난 15년 간 해온 강의다.

 

올해는 이 교수와 같은 에스페란토 사용자에게 각별한 해다. 에스페란토가 세상에 발표된 지 130주년, 창시자 자멘호프 박사가 사망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돌아가면서 열리는 세계에스페란토대회가 이번엔 한국에서 열린다. 한국에서 이 대회가 열리는 건 1994년 이후 23년 만이다. 한국에스페란토협회의 회장이기도 한 이영구 교수가 7월22일부터 일주일 동안 외대에서 열릴 이번 대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이 교수를 7월19일 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이영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 시사저널 임준선

 

에스페란토는 누구든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라고 알고 있다. 한글처럼 소리 나는대로 읽고, 쓴다고 들었는데.

 

에스페란토는 ‘소통’을 위해 태어난 언어다. 하나의 공통 언어를 사용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데서 오는 오해와 갈등을 없애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때문에 그 구조도 매우 단순하다. 기존의 언어구조를 전부 규칙화했다. 알파벳 28자에 문법은 16개뿐이다. 유럽어에서 많이 쓰이는 ‘남성형’ ‘여성형’에 따른 변화도 없다. 읽을 땐 무조건 뒤에서 두 번째 모음에 억양을 주면 된다. 모든 단어 끝에  ‘o’가 붙으면 명사, ‘a’가 붙으면 형용사, ‘e’가 붙으면 부사다. 단어 뒤에 ‘as’ ‘is’ ‘os’가 붙으면 현재형, 과거형, 미래형이다. 두 시간짜리 강의 네 번만 들으면 누구라도 간단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에스페란토의 특징이라면.

 

크게 세 가지 정도다. 일단 배우기 쉽다는 점이다. 앞서 설명했듯 불규칙 변형이 없고 소리 나는 대로 읽고 적는 솔직한 언어다. 또 중립적이다. 민족적․국가적 배경을 가진 언어는 필연적으로 그 안에 권력 관계가 내포된다. 과거엔 프랑스어가 세계어였고, 지금은 영어가 세계어로 쓰인다.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커지면서 중국어 인구도 늘고 있다. 이처럼 세계 권력 구조에 따라 ‘언어 파워’도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에스페란토는 이러한 파워게임으로부터 중립적이다.

 

마지막으로 언어로써 모든 걸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언어들이 하는 것처럼 에스페란토로 문학작품을 쓰고 상황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성서라든가, 세계적 명저는 이미 에스페란토로 번역돼 나왔다. 윌리엄 올드(Willam Auld)라는 스코틀랜드 문학가가 쓴 소설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평소 “에스페란토는 세계 평화 운동”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그런가.

 

에스페란토는 언어이기 이전에 세계 평화 운동이다. 창시자인 자멘호프 박사는 제정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그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가족들 간엔 이토록 화목하면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끼리 언쟁을 벌이고 갈등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에스페란토는 그 해답이다. 구약성서의 ‘바벨탑’ 일화에 나오는 것처럼 ‘언어의 차이’에서 모든 갈등과 분쟁이 시작된다고 본 것이다.

 

그가 처음 에스페란토를 발표하던 당시 유럽에선 만국 공용의 ‘국제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미 많은 철학자들로부터 국제어들이 만들어졌다 사라졌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사용자를 모았던 ‘볼라퓌크’가 있었다. 독일의 한 신부가 만든 것으로 그 자체가 ‘세계어’라는 의미다. 그런데 볼라퓌크는 창시자의 저작권이 강조됐다. 만국 공용이지만 귀속되는 집단이 있었던 셈이다. 

 

지멘호프 박사는 볼라퓌크의 장점과 한계를 모두 보고 자라난 세대다. 그는 진정한 만국 공용어가 되려면 그 언어를 누구나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의 생각이 옳았다. 개인적으로 세계에스페란토협회가 언젠가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위적으로 만든 국제어 가운데 가장 성공한 언어로 평가된다. 1908년 국제에스페란토협회가 창설된 후 50여 개국에 협회가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확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언어의 외적인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안 배웠다고 사회적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니지 않나. 한국 사회에서만 봐도 대학입시에서 에스페란토 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의 변방에 있는 언어일 수밖에 없다. 

 

만국 공용어 에스페란토의 창시자 자멘 호프 박사의 사진과 에스페란토를 상징하는 녹성기 © 사진=Pixabay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 한국 사회에서 에스페란토가 무슨 의미인가.

 

지금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목표는 매우 제한돼있다. ‘입시’ 그리고 ‘취업’ 뿐이다. 여기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사회처럼 보인다. 

 

획일화된 사회 속에 ‘작은 목소리’ ‘다른 목소리’로서의 에스페란토는 유의미하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다양한 범주 속에 펼쳐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저편에 살고 있는 민족․종교․문화를 가진 인간이 분명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문화적으로 건전한 사회는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수의 인원이 왜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 길을 가려하는지, 왜 그런 삶을 택하고 살아가는지 들여다볼 때 새로운 성찰을 할 수 있다.

 

어떤 물건의 무게를 달아볼 때 그게 가볍고 무겁고의 평가도 있겠지만, 각각의 무게에 담긴 나름대로 책임과 가치, 의미 역시 중요하다. 에스페란토의 의미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엔 에스페란토 회원 몇이나 되나?

 

한국에스페란토협회 회원으로서 연회비를 내는 회원은 300여명뿐이다. 그러나 등록되지 않은 에스페란토 사용자가 전국적으로 3만명 이상 될 것으로 추산된다. 에스페란토는 독학으로도 충분히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언어의 철학 자체가 인간 개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에스페란토 사용인구를 관리하진 않는다.

 

 

한국에 에스페란토가 들어온 건 언제인가.

 

식민지배 등의 이유로 모국어의 자유로운 사용이 어려웠던 국가의 지식인,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에스페란토가 사용되곤 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에 소설 《임꺽정》을 쓴 홍명희 선생의 호가 ‘벽초(碧初)’다. ‘푸를 벽’을 쓰는데, ‘푸른색’이 바로 에스페란토의 상징색이다. 홍명희 선생이 국내 에스페란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혔지만 시인 김억은 1920년 발간된 잡지 ‘폐허’의 창간호에 에스페란토로 쓴 시를 싣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그에 앞서 에스페란토의 강점을 꿰뚫어본 이가 있다. 바로 고종이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일본 잡지에 보면 고종이 에스페란토의 실용성에 탄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국제적 교류망도 탄탄하다고 들었다.

 

에스페란토의 세계평화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에스페란토 사용자 사이엔 ‘파스포르타 세르보(Pasporta servo)’ 라는 제도가 있다.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이 상대를 자신의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로 이어지는 커뮤니티인 셈이다. 

 

매년 세계에스페란토협회에서 발간하는 연감이 있다. 야르리브로(Jarlibro)라는 명칭인데, 각국의 에스페란토협회에 등록된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가 담겨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이 연감을 뒤져 연락을 취하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 혹은 국제적인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에게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이영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 시사저널 임준선

 

이번에 외대에서 개최되는 세계에스페란토대회의 주제는 뭔가.

 

올해는 여러모로 의미가 많다. 유네스코는 올해를 ‘자멘호프의 해’로 명명하기도 했다. 이번 대회는 유네스코의 ‘관광과 발전’이라는 주제를 가져왔다. 

 

대회 준비위원장으로서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준비했다. 젊은 대회, 재밌는 대회, 문화 체험을 많이 하는 대회다. 한국의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많이 짰다. 외국 회원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이해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현재 62개국에서 1200~1500명 정도가 참가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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