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대 잡았지만 시동 안 걸리는 남북대화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7.31 10:38
  • 호수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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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Insight] 한·미 정상회담 후 협상 주도권 잡았으나 북한은 묵묵부답

 

굳게 닫힌 문을 연신 두드렸지만 결국 열리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첫 대북 회담제의에 북한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시한을 넘긴 것이다.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거나 왜 거부하는지 입장을 밝힌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부는 더 속이 타들어간다. 남북 당국 간 관계에서 거부나 비방보다 더 예감이 좋지 않은 게 ‘전략적 무시’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다.

 

정부는 7월17일 북한에 남북 적십자회담과 군사당국회담을 동시에 제안했다. 앞서 같은 달 6일 독일 베를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밝힌 대북 접근 구상의 후속 조치 성격이었다. 오랫동안 남북 당국 사이에 대화가 끊어졌던 터라 조심스러운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낙관하는 시각도 있었다. 북한이 휴전선 지역에서의 군사적 ‘적대행위’ 중단을 위한 군사회담에 호응해 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해 5월 7차 노동당 대회에서 “북남 군사 당국 사이에 회담이 열리면 군사분계선 일대에서의 충돌 위험을 제거하고 호상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협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군사당국회담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도 긍정적 요인으로 거론됐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북한은 군사당국회담의 날짜로 남측이 제기한 7월21일을 아무런 반응 없이 넘긴 데 이어, 적대행위 중단 시점으로 제기한 27일까지도 답이 없었다.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 적십자회담을 8월1일 판문점에서 갖자고 제안한 데 대해서도 북한은 묵묵부답으로 대응하고 있다.

 

북한의 기류는 냉랭하다. 회담 제안에는 답을 주지 않으면서 관영 선전매체를 통해 대남비난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노동신문은 “남조선 당국이 상대방을 공공연히 적대시하고 대결할 기도를 드러내면서 그 무슨 관계 개선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여론 기만행위”라고 비난했다. 고(故)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14기 추모식을 8월4일 금강산에서 갖겠다는 현대아산 측의 요청에 북한은 “어렵다”며 거부입장을 통보해 오기도 했다. 현대 측이 희망하고 통일부가 승인한 추모행사를 북한이 거부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그동안 우호적 입장을 취해 온 현대아산 측에까지 방북을 허용하지 않은 것을 두고 북한의 대남노선에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지된다는 말도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7월6일 오후(현지 시각) 구 베를린 시청 베어홀에서 열린 쾨르버 재단 초청연설에서 한반도 평화구축과 남북관계, 통일 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北, 南 대화 제의에 ‘전략적 무시’

 

북한은 보수성향인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대부분을 대화와 교류협력보다는 도발에 치중했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위협이 이어졌고 이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됐다.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2개의 큰 빗장을 질러버렸다. 지난해 4월 탈북한 중국 내 북한 식당 여종업원의 송환과 한·미 합동 군사연습 중단이다. 이산상봉 등 인도적 문제를 다룰 적십자회담의 경우 식당 종업원 송환을, 군사당국회담의 경우 한·미 군사연습 중단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울 채비를 해 놓은 것이다. 마치 회담엔 뜻이 없으니 건들지 말라는 의미로 읽힌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초반 탐색전 과정에서도 남북 간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상황은 이어졌다.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과 여기에 대응한 문재인 대통령의 강경한 대북발언이 쏟아진 것이다. 취임 나흘 만인 5월14일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 발사 국면을 맞은 문 대통령은 대북발언 수위를 높였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을 강력 규탄하며 단호하게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다시 사흘 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를 찾아 북한을 ‘적(敵)’으로 지칭했다. “우리 군은 적의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적이 무력도발을 감행한다면 즉각 강력히 응징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정부는 북한의 회담 호응에는 시한이 없다고 강조한다. 언제든 응해 오면 된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당국대화나 이산상봉 등에 대한 평양 당국의 수용을 좀체 찾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북한이 당장 나서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린다. 군사분계선(MDL) 일대 긴장완화 문제를 남측 제안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건 북한으로선 껄끄럽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교류·협력 같은 사안은 북한에 낡은 레퍼토리일 수 있다. 북핵 문제는 미국과 논의할 이슈지 남북 당국 간 의제는 아니라는 북한의 입장도 확고해 보인다.

 

8월은 남북 간 대화나 교류 재개가 녹록지 않은 시기다. 무엇보다 북한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한·미 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이 하순에 예정돼 있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함께 추가 핵실험 문제까지 부상한 상태다. 북한의 미사일 기지에서 의도가 불분명한 동향이 이어지고 있고, 동해 수역의 북한 잠수함 활동도 한·미 군사 당국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고 있다.

 

 

국제 공조체제도 균열 조짐

 

대북제재와 관련한 한·미 공조에도 미묘한 엇박자가 감지된다. 미 하원이 북한의 원유 수입 봉쇄를 포함한 전방위 대북제재 패키지 법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과 거래한 중국 기업을 제재해 김정은 체제의 숨통을 바짝 조이는 조치를 강구 중이다. 북한이 7월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대성공’을 주장한 데 대해서도 미국은 위협을 부각시킨 데 비해, 한국은 대기권 재진입 기술 등이 미흡한 상황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남북 대화 추진을 두고도 한·미 간 인식차가 드러난다. 문재인 대통령은 6월말 한·미 정상회담에서 남북 대화와 관련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해가 있었다고 밝혔다. 한국의 대북정책과 관련해 이른바 ‘운전석’에 앉을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백악관 측은 대북압박이 필요한 시점에 회담제안이 이뤄진 데 대해 석연치 않아 하는 분위기다. 문제는 이런 어려움 속에 겨우 운전대를 잡았지만 정작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국면에서 자칫 추가도발 등 평양발 돌출악재가 터질 경우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노선은 초반부터 시련을 맞을 수 있다. 정부가 남북 직통전화의 신호음이 울리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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