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아주 특별한 약자 임산부, 배려석이 최선입니까?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28 15:51
  • 호수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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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갈등

 

“당신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보하겠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의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갈등은 끊이지 않는 것일까. 서울시가 지하철에 임산부 배려석을 설치한 것이 2013년부터라고 하니 벌써 5년이나 된 제도인데도 아직도 시끄럽다. 최근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임산부 배려석 비워두기 캠페인을 벌이는 분들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그에 비례해 논란도 오히려 커지고 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서울의 지하철 4호선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꽃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은 출입문 옆이라 바쁜 사람들이 선호한다. 타고 내리기 쉬우라고 지정한 자리이니 당연하다. 전동차에 올라타니 출퇴근 시간을 피해서인지 자리가 드문드문하다. 책가방을 멘 남자 청소년 하나가 나를 따라 타더니 폰을 들여다보며 그 자리에 앉는다. 나는 그 줄의 비어 있는 좌석 중 하나에 가 앉으며 그를 불렀다. “학생, 이쪽으로 앉죠?”

 

그는 깜짝 놀라 좌석과 나를 보더니 “아!” 하는 짤막한 감탄사를 뱉으며 자리를 옆으로 옮긴다.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승객들이 비워두고 있던 자리여서, ‘비어 있음’이 제일 먼저 보였다. 한 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선명한 분홍 표지도 보일 게다. 바로 그 한 번. 그 한 번의 주의환기를 위해 나는 아주 가볍게 그를 불렀고 그 역시 가볍게 자리를 옮겼다.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는 일은 우리 사회가 맺어가고 있는 약속이므로, 약속에 참여하려는 선의가 있는 사람에겐 그 주의를 환기해 주는 일이 불쾌하거나 복잡한 변명이 필요한 대단한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하철 내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인권의식이 답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갈등 가운데 상당 부분은 ‘배려석’ 그 자체에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그 자리가 임산부 배려석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비워두기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은 노약자석을 아예 비워두는 사례처럼, 임산부 배려석도 비워둘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배려석은 어디까지나 ‘배려’석이므로, 임산부가 요청하면 비켜주겠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지하철 좌석은 전형적으로 공급과 수요가 어긋나는 서비스이며, 비워둬도 임산부가 아닌 사람들이 앉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임산부를 식별할 수 있고 자리 양보를 요청할 수 있게끔 하는 시스템이 오히려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즉, 임산부 배려석을 인지하고 비워두느냐, 임산부를 식별하고 좌석을 양보하느냐. 의문이 생긴다. 어느 쪽이든, 임산부는 마음 편하게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을까. 임산부 배려석이든 임산부 배지든, 심지어 부산-김해 경전철에서 시행한다는 임산부 패치(임산부가 타면 배려석에 불이 들어오는 장치)든, 임산부에 대한 존중을 앉을 자리를 내어주는 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배려석을 비워두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임산부 아닌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뿐. 그런데 실상은 어떨까?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갈등을 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임신이 벼슬이냐’라느니, ‘맘충’이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너만 임신해 봤냐?”라는 폭언을 퍼부은 중년 여성도 있다. 임산부 배지를 단 여성에게 보이지도 않는데 달고 있다고 면박을 주었다는 사례도 있다. 어쩌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배려석이 아니라 임신한 여성 그 자체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인지가 없는 것은 아닐까? 배려석이 있으니 마지못해 비켜주기는 하겠지만, 임산부는 흡사 내 권리를 침해하는 불쾌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임신을 하게 되면 몸과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임신이 시작된 순간부터 여성은 구토와 어지럼증과 무력증과 소화불량과 심지어 우울증을 경험하기도 하고, 척추디스크에 걸리고 당뇨와 고혈압이 생기기도 한다. 유산이 돼 몸과 마음이 몹시 상하기도 한다. 겉모습의 변화보다 훨씬 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산모도 태아도 다 건강하다는 의사의 말은 알고 보면 이러한 신체의 고통이 당연하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막상, 남편과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임신한 당사자조차도 임신한 여성의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일쑤다. TV 드라마에서 입덧하는 모습이나 본 것이 고작인 경우가 많다. 무지하므로 임산부를 단지 그 배 속의 아이 때문에 배려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일까지 발생한다. 미래의 아이를 위해 비워두는 좌석이라는 임산부 배려석 캠페인이 그 무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도 있다. 사회가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 임산부 자신이 아닌 배 속의 아이라는 인식은 그 자체로 여성을 생산수단으로 보는 것임에도, 그 캠페인이 시작되기까지 캠페인 관련자들은 문제를 인식도 하지 못했다. 미래의 아이가 아니라 현재의 임산부를 바라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뜻이다.

 

 

“임산부 배려석 비워두기 캠페인 지지”

 

그렇다면, 임신한 여성이 아주 특별한 약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면 임산부를 배려하는 모든 정책이 제대로 시행될까? 약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약자란 공격하고 지배하고 무시해도 되는 자, 소위 말하는 ‘을’이라는 생각에 가깝다. 더구나 임산부는 한시적인 상태이며 개인적으로 치러내는 약자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 임신 초기인 여성들은 세상을 향해 과감히 도움과 배려를 요청할 정도의 신뢰를 표명하기 어렵다.

 

때문에 나는 임산부 배려석이 선의를 강요한다는 일부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비워두는 일의 불합리를 지적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비워두기 캠페인을 지지한다. 여성이 등장하는 모든 국면에서, 여성 문제는 결국 인권 문제가 되기에, 모든 계몽적인 문제제기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4호선 지하철의 청년은 내 말을, 무시할 수도 있었고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아무 데나 앉을 권리”를 고집하는 것에 자존심을 걸 수도 있었다. 임산부 배려석 설치의 불합리함을 강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를 비워두는 선택을 했으며 말다툼을 하지도 앉았다. 승객이 드문드문했으므로 누군가 그 자리에 이미 앉았어도 임산부는 다른 곳에 가서 얼마든지 앉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출입문 옆자리가 꽉 차 있었지만 선명한 꽃분홍 자리 두 개만 비어 있는 풍경에 왠지 마음이 놓였다. 최대한 끝까지 저 자리를 비워두려는 노력이 일반적이 될 때, 임산부들도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배려석 앞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하철 당국은, 배려석이 아니라 임산부임을 식별할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 더 합리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혹은, 노약자석을 핑크로 칠하고 노약자 및 임산부 지정 좌석으로 두는 것이 어떨까? 임산부가 약자라는 사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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