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질서 만들어준 총, 균, 그리고 환경변화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0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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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유럽사 편)]

 

사실 유럽이 새로운 식민지, 특히 남아메리카를 개척한 과정은 역사적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누리고 있었던 남아메리카의 대제국들이 대서양의 긴 항해에 시달리며 건너 온, 그야말로 한 줌도 안 되는 유럽인에게 어이없이 굴복해가는 과정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그러니까 유럽의 입장에서는 가장 성공적이며 원주민 입장에서는 제일 비통한 사례 하나를 새로 조명해보기로 하자. 스페인의 프란치스코 피사로라는 인물이 일으키기 시작한 잉카 제국 정복 얘기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넌 지 40년 후인 1531년, 피사로는 168명의 군사와 27필의 말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 당시 남아메리카 대륙 최강의 제국이었던 잉카에 입성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로서 최고의 정복왕이었던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했다. 이때 그 현장에서 아타우알파와 함께 있었던 신하들의 수만 무려 8만 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를 인질로 잡아두고 역사상 가장 많은 몸값을 뜯어냈다. 가로 6.7m, 세로 5.2m, 높이 2.4m의 방에 가득 찰 만큼의 황금을 요구했고 잉카 사람들은 그걸 순순히 바친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신대륙 드림을 꿈꾸는 유럽인들의 폭발적인 대서양 진출에 도화선이 되었다.

 

클리프 해리스& 랜디 맨, ‘Global Temperature’ 게재 그래프로부터 재구성. © 사진=이진아 제공

 

아주 간단하게 훑어보아도 비현실적이다 싶을 만큼 드라마틱한 얘기지만, 앞 뒤 정황을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놀라운 사건 전개다. 소빙하기 초기까지 유럽은, 특히 서유럽은 지구상에서 가장 먹고살기 힘든 지역 중 하나였으며, 인구도 적었고 기술면에서도 낙후한 편이었다. 신대륙에 비교해도 그랬다. 예를 들면 근대 이전 유럽 국가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 시의 인구는 가장 많았던 시기인 서기 400년 정도를 기준으로 보아도, 같은 시기 중앙아메리카 테오티와칸 제국 수도 인구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일방적이었던 유렵인의 잉카 정복기

 

게다가 초기에 대서양을 건너는 항해에 목숨을 걸겠다고 나서는 유럽인들 중에는 제대로 훈련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 그리 크지도 않은 배 위에서 몇 개월을 시달리다가 겨우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뎠는데, 상당한 문명수준을 이루어 살고 있었던 홈그라운드의 원주민들, 그 중에서도 최강자로 군림하던 이들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정복자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을까?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팩트(fact)는 명확하다. 당시 스페인 원정대에 참여한 사람들의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원주민들의 문화를 무시하고, 학살과 탄압 일변도로 행동했으며, 앞 뒤 안 가리고 황금을 뜯어내는 데만 혈안이었다. 따라서 초기에 기선 제압하는 게 가능했던 것 같다. 이에 비해 도착했을 때는 엄청난 위용을 갖추고 있었던 원주민 지도부가 이 말도 안 되는 폭도들의 만행이 시작되자 맞서 싸우기는커녕, 멍한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원주민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 땅 표면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이 장면을 보기로 하자. 다음과 같은 지도와 그래프가 도움이 될 것 같다.

 

소빙하기 동안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대형 화산 폭발. 1783년의 라키 화산을 제외하면 대부분 환태평양 ‘불의 고리’ 지역에서 발생했다. (그래프 출처: Fei Liu 외, Global monsoon precipitation responses to large volcanic eruptions, Nature, 2015년 4월 11일 온라인 판) © 사진=이진아 제공

 

소빙하기는 기온도 낮았지만 다른 시기보다 화산폭발도 심했던 시기였다. 대형 화산이 폭발하면 화산재가 대기권 기류에 실려 전 세계의 기후에 영향을 준다. 햇볕을 차단해서 기온을 떨어뜨리고 농업생산성을 크게 저하시킨다. 그로 인한 식량부족도 문제지만, 화산재가 호흡곤란·혈액순환 장애 등을 유발해서 면역력도 크게 저하된다.

 

위 지도는 소빙하기 기간 동안 전 세계의 기후에 뚜렷한 영향을 줄 정도로 컸던 화산폭발만 표시한 것이다. 일명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 화산지대에 폭발이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밑의 그래프는 이 시기 동안 화산폭발로 인해 대기 중으로 유입된 화산재 총량을 나타낸 것이다. 1200년대 말에는 특히 화산폭발이 다른 어느 시기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어 소빙하기 말까지 간헐적이기는 하나, 다른 시기에 비해 규모가 월등 큰 화산폭발이 많았으며, 전반적으로 화산폭발이 잦았다. 그것도  주로 남반부 및 열대 인근 저위도 지방에 집중됐다. 

 

이렇게 되면 지구상에서 가장 타격을 입는 지역이 남아메리카다. 지표면에서는 대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남미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서 화산이 폭발해도 그와 함께 발생한 유황과 화산재는 남미 쪽으로 실려 가게 되어 있다. 이 그래프에 표시된 화산 정도로 규모가 큰 폭발일 경우,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에 있는 가까운 지역의 토양이 이전처럼 회복되려면 100년, 200년이 걸리기도 한다. 

 

식량이 줄어들고 화산재의 영향으로 몸과 마음이 잘 돌아가지 않아 혼란스러워지면, 사람들 마음도 급해지고 공격적이 되어서 소소한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1200년대 말부터 1300년대 중반까지 집중적으로 발생한 환태평양 ‘불의 고리’ 화산 폭발은 그래프에서 보다시피 열대에 가까운 곳에 집중됐다. 따라서 그 화산재는 남미 대륙의 열대 인근 저위도 지방에 위치한 국가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잉카 제국은 그보다는 위도가 높은 쿠스코 지방, 그것도 천혜의 요새와 인근의 비옥한 땅을 제공해주는 마추픽추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타격을 덜 입었을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내륙에 위치한 육지 사람들이어서 한랭기에 활동할 동기도 강했고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다음 지도는 이런 상황에서 잉카가 남미에서 얼마나 빨리 세력을 확장해갔는지 보여준다.

 

화산폭발의 영향으로 저위도 지역의 사회들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을 무렵인 1400년대 전반부터, 잉카는 본원지인 쿠스코로부터 안데스 산맥 줄기를 따라 영토를 확장해간다. 빨간 색으로 표시된 원래 영토에서 단 100년 사이에 얼마나 빨리 영토가 확대됐는지 알 수 있다. 그만큼 다른 사회들이 쇠약해져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른쪽 사진은 쿠스코 지역 마추픽추 산 위에 자리 잡은 잉카의 수도 유적. © 사진=wikimedia

 

서로 힘든 상황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전쟁이 이어져가는 가운데 잉카가 승기를 잡긴 했지만, 1452년, 쿠스코와 거의 위도가 같은 태평양 건너 바누아투 섬에서 또 대형 화산이 폭발한다. 편서풍의 패턴으로 볼 때 이 폭발은 남반구에서 쿠스코보다 위도가 높은 지역에 타격을 주는 방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덕분에 1400년대 말과 1500년대 초에 걸쳐, 잉카는 좀 더 위도가 높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승자였다 해도 100년 이상 정복전쟁을 지속해오게 되면 심신이 지칠 수밖에 없다. 또 화산폭발로 인한 타격이 다른 지역보다 덜 했다 뿐이지, 잉카에게도 당연히 적지 않은 타격이었을 테다. 이런 상태에서 콜럼버스 이후 유럽인이 가끔 왔다 갔다 했던 것이다. 

 

왕래 초기의 유럽인은 아무런 공격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균을 가져다 퍼뜨린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옮겨온 병원균이, 그에 대응할 면역세포가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몸 안에서 일으킨 위력은 거의 핵폭탄급이라 할만 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유럽인들을 도와 남미 원주민을 몰살시키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전염병은 절묘하게 유럽인들은 피해가고 원주민들만 고열과 구토 속에서 퍽퍽 쓰러뜨려갔다.

 

 

뇌과학이 밝힌 ‘그 날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20세기동안 발달한 과학적 연구 성과 덕분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사람이라기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도무지 알 수 없는 상대를 만난 원주민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정복전쟁을 통해 악행을 많이 저질러 온 자신들에게 내리는 신의 천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최근 뇌과학 성과에 입각한 면역학 연구는 ‘두려움’의 의식 상태에서는 면역력이 급속히 저하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원주민들은 그 상황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더욱 상황을 악화시켜간 것이다.

 

이런 인과관계를 모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로, 남미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주권과 생사여탈권을 유럽인들에게 내주었다. 이어 유럽인의 학대와 살인적인 중노동에 시달리는 세월이 계속 되었고, 좀 회복할 만하면 위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또 ‘불의 고리’ 화산이 터져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정복자 유럽-피정복자 남미 원주민이라는 질서는 19세기 후반까지 거의 흔들림 없이 이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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