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은 커피를 만들고, 커피는 위대한 사상가를 만든다
  • 구대회 커피테이너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04 16:43
  • 호수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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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회의 커피유감] 프랑스 지성 볼테르, 하루 커피 50잔 거뜬히 마셔

 

작가들은 글을 쓰는 고통을 ‘산통’(産痛)에 비유한다. 술은 잠시 고통을 잊게 하고 위안을 주지만, 술로 글을 이어갈 수는 없다. 반면 커피는 쉼표와 같아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을 준다. 신께서는 카페인에 민감해 커피를 마실 수 없는 작가들을 위해, 커피에게 향 또한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맛이 좋은 차 가운데 향이 없는 것은 있으나, 맛있는 커피 가운데 향이 없는 것은 없다. 이 점이 차와 커피가 다른 점이다.

 

《고백록》 《에밀》 《사회계약론》 등을 집필한 장 자크 루소(1712~78)는 볼테르와 더불어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의 사상적 근간을 만들었다. 루소의 어머니는 그를 낳은 후 9일 만에 숨졌다. 그것 때문인지 그는 생애 내내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끊임없는 방황과 유랑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이 그로 하여금 깊이 사유하게 했고, 그의 사상적 기반을 탄탄하게 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대표작 《에밀》은 근대적 교육론에 관한 대표 저서로, 당시 ‘육아의 바이블’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루소는 젊은 세탁부 테레즈와 사이에서 낳은 다섯 명의 사생아를 고아원에 맡겼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가 가정부의 월급을 십 수년 동안 주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 프랑스의 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왼쪽부터) © 사진=연합뉴스

 

루소 유언 “더 이상 커피잔을 들 수 없구나”

 

평소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했던 루소는 프랑스 최초의 카페로 유명한 르 프로코프(Le Procope)의 단골손님이었다. 준수한 외모만큼이나 커피를 마시며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커피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아, 이제 더 이상 커피잔을 들 수 없구나….” 당시로는 적지 않은 6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더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에게 커피는 좋아하는 음료인 동시에 사유를 하고 글을 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커피잔을 놓고 싶다”가 아니라 “커피잔을 들 수 없다”라고 한 것은 더 이상 살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으로 미국의 독립(1776년)에 이어 맞이하게 될 새로운 세상, 프랑스 혁명을 보고 싶은 그의 바람을 담은 메타포는 아니었을까?

 

루소와 더불어 계몽주의 사상가의 신적 존재였던 볼테르(1694~1778)를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단어가 ‘톨레랑스’(Tolérance), 관용이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 비록 후대의 작가가 볼테르에 관한 책을 저술하다가 잘못 적은 이야기라 하지만, 이보다 그의 삶을 잘 표현하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볼테르는 커피의 해악성을 언급할 때 항상 예외적인 인물로 거론된다. 그는 하루에 커피를 평균 50잔 이상 마셨다고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84세까지 장수했다. 커피를 아무리 묽게 마셨다고 해도 그의 위장은 남달리 무척 건강했던 모양이다. 볼테르는 50잔의 커피를 마시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커피가 없었다면, 그의 명저인 《관용론》 《풍속시론》 《철학사전》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커피는 숱한 밤을 지새우며 글을 써 내려갔을 볼테르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각성제이자 외로운 밤을 함께할 친구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 치 혀를 잘못 놀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커피에 대한 찬사를 멋지게 남겨 역사에 기록된 사람도 있다. 탈레랑(1754~1838)은 18~19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외교관이자 작가였는데, 나폴레옹을 정계에 진출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그는 보은 인사로 10여 년간 외무장관을 역임한다. 평소 커피를 좋아했던 그는 작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다음과 같은 커피 예찬을 남긴다. “악마같이 검으나 천사같이 순수하며 지옥같이 뜨거우나 키스처럼 달콤하다.” 지금도 상업적인 커피 광고에 쓰일 뿐 아니라 커피 관련 서적에 빠짐없이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이 짧은 문장은 커피의 본질에 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인 동시에 커피의 멋스러움을 가장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위 문장을 읽을 때마다 봄의 정취를 노래한 이조년의 시조 《이화(李花)에 월백(月白)하고》가 떠오른다.

 

커피의 힘에 의지해 글을 쓴 대표적인 작가로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가 있다. 그는 나폴레옹 숭배자로도 유명한데, 그가 활동할 당시 이미 나폴레옹은 절대 권좌에서 물러났음에도 그의 소설 곳곳에 황제가 등장한다. 나폴레옹이 이룩하지 못한 유럽 통일의 꿈을 그는 글로써 이루고자 했다. 커피를 하루에 40잔 가까이 마시면서 말이다.

 

그의 커피 예찬인 ‘Treatise on Modern Stimulant’ 중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커피가 위 속으로 떨어지면 모든 것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생각은 전쟁터의 기병대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기억은 기습하듯 살아난다. 작중 인물은 즉시 떠오르고 원고지는 잉크로 덮인다.” 그가 글을 쓰는 데 커피의 도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역동적인 단어로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근대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명저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도 임마누엘 칸트(1724~1804년)라는 대철학자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허약체질이었는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건강을 유지한 덕분에 오랜 세월 강의와 연구 그리고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칸트는 하루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각에 산책에 나섰기 때문에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산책하는 그를 보고 시계의 시각을 맞췄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런 칸트도 단 한 번,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느라 산책 시간을 어겼다고 한다.

 

그 역시 커피를 무척 좋아했다. 그 점잖고 고매한 철학자도 커피에 대해서만큼은 인내심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커피를 준비하는 하인이 “교수님, 커피가 곧 준비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제야 준비하고 있나?”라며 커피를 재촉하고 불평했다고 한다.

 

 

온화한 성격의 칸트, 커피 마시는 것 집착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건강을 유지했던 그도 야속한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799년부터 크게 쇠약해진 칸트는 1804년 2월12일,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죽기 전 늙은 하인 람페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했다. 그리고 “좋다!”라는 마지막 말을 하고는 눈을 감는다. 만약 그가 포도주가 아닌 커피를 마시고 세상을 떠나기 전 한 문장을 남겼더라면 루소를 능가하는 커피사에 길이 남을 명언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그럼 왜 칸트는 죽기 전 커피가 아닌 포도주를 선택했을까? 그가 포도주를 선택한 것은 깨어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영면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즉 그 순간이 그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팔십 평생을 누구보다 각성된 상태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그가 이제 인생이란 커피잔을 놓고 싶었던 것이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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