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김정은 몽니에 속 타는 실향민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29 11:08
  • 호수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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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이산가족 상봉 불발…국면 전환용 카드로 쓸 수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 드라이브로 촉발된 북·미 대치가 심상치 않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거친 말싸움으로 긴장 수위를 올리더니 마침내 북한 측에서 ‘선전포고’ 운운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72차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9월25일(현지 시각) 기자회견을 자청해,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경고발언을 빌미로 “앞으로는 미국 전략폭격기가 북한 영공을 침범하지 않아도 자위권을 행사하겠다”며 격추를 위협하고 나선 것이다.

 

한반도 정세도 격랑이 일면서 남북관계는 꽁꽁 얼어붙었다. 지난 5월 문재인 정부 출범을 계기로 해빙이 기대됐지만 여의치 않았다. 김정은이 잇단 탄도미사일 발사에 이어 9월초에는 6차 핵실험이라는 그야말로 핵폭탄급 도발을 행동에 옮긴 여파다. 취임 초 북한과의 대화 쪽에 무게를 싣던 문재인 대통령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대화는 어렵다”고 선언한 뒤 미·일 등 국제사회와의 강력한 북한 압박 공조에 나섰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서 가장 속이 탈 수밖에 없는 이들은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들이다. 특히 기대를 모았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불발되면서 올 추석 연휴는 유난히 쓸쓸한 시간이 됐다. 핵위협까지 구사하는 북한의 도발 수위가 극한을 달리고 남북 간 최소한의 소통의 끈마저 끊어지면서 돌파구 마련도 쉽지 않은 형국이라는 게 정부 당국과 대한적십자사(한적) 측 설명이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2015년 10월 금강산에서 열린 이후 더 이상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2015년 10월23일 북한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 시시저널 이종현

 

이산의 恨 풀지 못하고 7만687명 사망

 

통일부와 한적이 함께 운영하고 있는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 통계를 살펴보면 이산상봉 문제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지난 6월말 기준으로 이산상봉을 공식 신청한 사람은 13만1200명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생존자는 6만513명에 불과하다. 북한 가족과의 만남을 간절히 바랐지만 끝내 이산의 한을 풀지 못하고 숨을 거둔 사람이 7만687명으로, 전체 신청자의 53.9%에 달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고령 이산가족의 비중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산가족 생존자의 연령대는 90세 이상이 19.6%(1만1866명), 80〜89세 43.0%(2만5991명), 70〜79세 22.9%(1만3873명), 60〜69세 8.4%(5081명), 59세 이하 6.1%(3702명)로, 80세 이상 비율이 62.6%에 이를 정도로 고령화됐다. 시급히 상봉이 이뤄지지 않으면 대부분 사망하거나, 상봉이 이뤄진다 해도 의미 있는 수준에 이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적 관계자는 “고령 이산가족의 경우 북한의 가족과 만나도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어렵거나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상황도 벌어진다”고 설명했다. 이산상봉 해결을 위한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대 정부는 모두 이산가족 문제를 대북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고 강조해 왔다. 그만큼 남북 분단의 가장 큰 아픔이자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란 얘기다. 문재인 정부도 출범 초기부터 남북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의욕을 보였다. 문 대통령은 7월6일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추석과 2차 남북 정상회담 공동선언 10주년이 겹치는 10월4일을 계기로 이산상봉을 하자고 북한에 제안했다. 그 후속조치로 한적은 7월17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열자고 북한에 제의했지만 조선적십자회 측은 이에 대해 가타부타 언급조차 없이 불발시켰다.

 

대신 북한은 지난해 4월 집단 탈북한 중국 북한식당 여종업원들을 돌려보낼 것을 촉구하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이산상봉을 비롯한 어떠한 인도주의 사업에도 호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도 탈북 여종업원들이 북한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실현 불가능한 전제조건을 내세워 이산상봉에 빗장을 질러놓은 셈”이라고 말했다. 현재로선 이산가족 상봉에 나설 의사가 없다는 의사표시란 해석이다.

 

남북 이산상봉은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 두 달 만인 2000년 8월부터 본격화했다. 1985년 9월 남북 이산가족이 고향방문단 교환 방식으로 만난 것을 포함해 모두 21차례 대면 상봉을 통해 남북 4185가족, 총 1만9928명이 재회했다. 이 밖에 7차례의 화상 상봉을 통해 577가족, 3748명이 혈육의 모습을 화면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서신교환 사업을 통해선 남북 각 300명씩 모두 600명의 이산가족이 소식을 주고받았다.

 

 

김정은, 이산가족에 관심 없다는 관측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에 거부감을 보이는 건 경색된 남북관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뒤 미국과의 대치 국면이나 협상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응할 경우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김일성·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의 경우 이산가족 문제 등에 대해 그리 깊은 관심이 없기 때문이란 관측도 나온다.

 

남북한은 모두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적 사안’이라고 밝혀왔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 이산가족 상봉을 정치이슈로 삼으면서 가장 큰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온 게 사실이다. 상봉을 대가로 대북지원을 챙기거나 주요한 협상 고비에서 마지막 히든카드로 활용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다. 이 때문에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 행보에서 평화공세 국면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산상봉 카드를 써먹으려 시도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서울 핵 불바다’ 같은 호전적 발언을 쏟아낸 상황에서 급작스레 유화 국면으로 돌아서기 껄끄럽다고 판단할 경우 이산상봉 제안을 윤활유 삼아 나설 것이란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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