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으로 돌변한 직장 상사들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11.12 17:06
  • 호수 1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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곪을 대로 곪은 직장 내 성범죄 “피해 당해도 불이익 우려해 그냥 넘어가”

 

성폭력은 영혼을 파괴하는 범죄다. 가해자는 한순간의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피해자는 그 상처가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다. 극도의 수치심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직장 내 성폭력은 피해자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는 게 현실이다.

 

최근 가구전문업체 한샘을 시작으로 직장 내 성폭력 사건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사내에서 은밀하게 일어난 성범죄가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업 내부에서 곪아 있던 문제가 일시에 터져 나오는 모양새다.

 

한샘 사내 성폭행 사건은 가히 충격적이다. 10월26일 피해자 A씨(24)는 포털사이트 커뮤니티인 ‘네이트 판’에 자신이 당한 일을 올려 큰 파장을 불러왔다. A씨는 자신을 지난해 말 입사한 신입사원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입사 후 각각 다른 직원들로부터 몰래카메라, 성폭행,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는 지난해 12월 회식 때였다. 입사 동기인 남자 직원이 화장실로 따라와 몰래 카메라로 A씨를 촬영하다 발각됐다. 해당 남자 직원은 해고됐다. 두 번째는 올해 1월13일에 일어났다. A씨에 따르면, 그녀는 신입사원 교육을 담당했던 선배와 함께 술을 마셨다. 선배는 A씨를 집에 데려다주는 척하며 모텔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고 한다. 그 후 A씨가 해당 교육담당자를 고소했으나 인사팀장이 해고 등을 언급하며 “허위 진술을 작성하라”고 회유했다.

 

결국 A씨는 해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고, 그의 해고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을 바꿨다. 교육담당자에 대한 고소 포기에도 동의했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과 검찰은 교육담당자에 대해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해고 처분을 받았던 교육담당자는 정직 3개월과 지방전보조치로 징계가 완화됐다.

 

세 번째 가해자는 인사팀장이었다. A씨는 지난 4월 인사팀장이 자신을 부산의 한 콘도로 불러내 성희롱과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한샘은 인사팀장을 풍기문란을 이유로 감봉 조치했다가 허위진술 요구 등을 이유로 해고했다.

 

A씨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다시 문제 삼은 것은 사내에 꽃뱀으로 소문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해자인 본인이 오히려 가해자로 몰리자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A씨의 글이 큰 파장을 일으키자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교육담당자도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A씨에 대해) 각별한 마음이 있었고, 수없이 많은 카톡을 주고받으며 서로 호감을 표현했다. 그날 이후에도 다시 연락이 와 평소처럼 농담 섞인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나눴다”며 합의에 의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몰래카메라 피해를 제외하면 당사자 간 입장이 달라 아직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 일러스트 오상민

 

한샘 여직원 폭로 후 피해자 속출

 

직장 내 성범죄가 발생하면 회사는 즉시 행위자에 대한 징계나 이에 준하는 조치를 해야 한다. 통상 취업규칙에 따라 인사위원회를 열고 징계 수위를 정하도록 돼 있다. 피해자는 보호 조치를 해야 하다.

 

하지만 한샘은 성범죄를 막아야 할 책임자가 오히려 비슷한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하기가 어렵다. 여론이 악화되자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을 통해 사내 성폭력 사건에 엄중히 대응하고 피해자의 업무 복귀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는 한샘에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예방과 징계 등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근로감독에 착수했다.

 

현대카드 위촉계약사원도 팀장에게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폭로했다. 한샘 논란에 이은 두 번째 사내 성폭행 고발글로 여론의 큰 공분을 샀다. 현대카드 측은 해당 사건에 대해 자체 감사실과 외부 감사업체, 또 검경의 조사가 병행됐으나 무혐의로 결론 났다며 유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논란이 된 사건 외에도 포털사이트에는 “나도 피해자”라며 많은 경험담이 올라왔다. 직장인들이 모인 한 카페 회원인 B씨는 “여자라면 한 번씩 다 당하는 것 같다. 나도 우리 회사 대표를 준강간미수로 고소해서 이겼다. 다음 회사에서도 성희롱하는 과장 때문에 힘들었다”며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건 외에도 성희롱 등을 거부했을 때 회사에서 오는 불이익 때문에 말 못하는 여성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직장 내 성폭력은 일반 기업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공무원 사회에도 만연돼 있다. 최근 동료 여직원을 대상으로 성 범죄를 저지른 공무원들이 잇따라 인사 조치나 사법처리를 당했다.

 

지난 4월 충남 부여경찰서는 동료 여직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부여군 공무원을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D씨는 군청 주변 식당에서 직원들과 회식을 한 뒤 술에 취한 여직원을 집에 바래다준다며 차 안에서 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포항에서도 비슷한 혐의로 공무원이 입건됐는데, 해당 공무원은 근무를 마친 후 부하 여직원과 주점에서 술을 마신 뒤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한 혐의다.

 

전남 강진에서는 공무원 최아무개씨가 술자리에 동석했던 동료 여직원을 성폭행하려다가 또 다른 동료에게 현장이 목격됐다. 최씨는 다음 날 군청 감사 부서를 찾아가 “술에 취해 여성 공무원에게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알린 뒤 자신의 빌라 계단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강진군은 피해자 보호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개인의 일탈 행동으로 치부한다는 비판을 샀다.

 

이 밖에 다른 지역의 공직사회에서도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으로 입건되는 공무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사법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부하 여경을 성추행한 간부들이 입건되는 등 경찰 내부에서도 성추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제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적극적인 대책 마련보다는 쉬쉬하며 덮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형국이다. 지난해 중앙부처에서 정년퇴직한 김아무개씨는 “사실 공직사회는 일반 회사보다 ‘성’에 대한 의식이 낮다. 나이 든 공무원들의 경우 여직원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관행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단골 식당 등에서 종업원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한다. 이걸 성추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여전히 겉돌고 있는 방지대책

 

직장 내 성범죄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단체나 언론에서는 20년여 전부터 끊임없이 직장 내 성희롱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왔다. 직장 내 성희롱이 공론화 단계에 들어선 것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해 12월7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공개토론회’가 개최돼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이날 토론회에서 이수연 한국여성민우회 간사는 “성희롱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성과 관련된 언동으로 불쾌하고 굴욕적인 느낌을 갖게 하거나 고용상의 불이익 등 유·무형의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당시 한국여성민우회는 전국의 직장여성 450명을 대상으로 첫 ‘성희롱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87%가 어떤 형태로든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가장 빈번하게 당하는 성희롱(복수응답)은 음담패설 등 성적 농담으로 71.4%를 차지했다.

 

이런 성희롱에 대해 50.8%가 ‘웃어넘기거나 무시’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밝혔고, ‘즉각 항의나 경찰에 신고’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우는 14.5%에 지나지 않았다.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현재 묵인·방치되고 있는 성희롱 행위에 대한 법제정 등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24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개선되고 달라졌을까.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성희롱 실태분석과 형사정책적 대응방안 연구’에서 직장인 1150명(여성 698명, 남성 452명)을 대상으로 성희롱 피해 경험을 설문조사했다. 그랬더니 52%의 여성이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1993년 조사 때보다는 35%가 감소했지만, 획기적인 변화라고는 볼 수는 없다.

 

피해자들의 대응도 여전히 소극적인 형태에 머물렀다. 여성가족부가 2015년 8월30일부터 11월9일까지 공공기관과 민간사업체 일반 직원 7800명을 대상으로 한 ‘2015 성희롱 실태조사’를 보면,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의 78.4%가 당시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최근 ‘성범죄’ 관련법이 이전에 비해 상당히 엄격해진 것은 사실이다. 법원에서도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강력한 처벌에도 성범죄가 반복되는 것은 방지대책이 겉돌거나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직장 내 성범죄는 기업문화의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적인 인간관계와 직장 내 권력관계가 중첩되기 때문에 성범죄를 당해도 공론화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하면 그만큼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국가적 시스템이 마련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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