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와 박지성이 설계하는 한국 축구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1.24 11:04
  • 호수 1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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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개혁 외치는 축구협회에 행정가로 합류한 두 레전드

 

대한축구협회가 11월8일 대대적인 조직 개편안을 발표했다. 정몽규 회장이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한국 축구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도록 개혁과 쇄신에 돌입하겠다고 약속한 데 따른 후속조치다. 앞서 축구협회는 국가대표팀의 부진, 거스 히딩크 감독 부임 루머에 대한 미숙한 대처, 전임 집행부의 공금 및 법인카드 유용으로 인한 도덕성 문제 등 각종 논란이 이어지며 코너에 몰렸었다.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인적쇄신이었다. ‘회전문 인사’ ‘고인 물’로 일컬어진 축구협회의 돌려막기식 수뇌부 선임은 비판의 중심에 있었다. 히딩크 감독을 둘러싼 논란에 끌려간 김호곤 부회장 겸 기술위원장, 현 대표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용수 부회장 겸 전 기술위원장, 행정 전반의 난맥상과 불통을 야기했다는 지적을 받은 안기헌 전무이사가 일괄 사임했다.

 

 

축구 행정의 세대교체, 30·40대 전면 배치

 

정몽규 회장은 예상을 뒤집는 선택을 했다. 행정 인력의 세대교체였다. 50·60대의 축구인들이 대거 물러난 자리에 같은 연배의 경험 많은 인물보다 신선한 얼굴을 합류시켰다. 대표적인 인물이 홍명보와 박지성이다. 지난 브라질월드컵에서 대표팀을 이끌었던 홍명보 감독은 축구협회 살림 전반을 책임지는 전무이사를 맡았다. 유럽파 2세대의 아이콘이자 현 한국 축구의 롤 모델인 박지성은 유스(Youth) 전략본부장으로 선임됐다. 40대의 홍명보와 30대의 박지성이 협회 주요 전략을 이끄는 조직의 중심으로 일거에 진입했다.

 

다른 요직도 마찬가지다. 홍명보 전무를 보좌할 사무총장에는 1970년생인 전한진 국제팀장을 내부 승진시켰다. 실장급을 거치지 않은 실무진을 올린 파격 승진이다. 축구 발전을 위한 중장기 정책을 수립하고 기술연구 기능을 담당하는 기술발전위원장에는 1971년생인 이임생 전(前) 톈진 테다 감독을 선임했다.

 

© 사진=연합뉴스

최영일 전 동아대 감독, 조덕제 전 수원FC 감독이 부회장을 맡아 학원 축구와 성인 축구를 전담한다. 신임 부회장들은 모두 50대 초반이다. “젊고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조직을 바꾸겠다”고 했던 정몽규 회장의 의지가 드러난 인사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홍명보 전무와 박지성 본부장이다. 국민 다수에겐 여전히 선수, 혹은 감독의 이미지가 강한 두 사람이 행정가로 변신한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대표팀의 최고참과 막내급으로 호흡을 맞추며 4강 신화로 한국 축구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일각에서는 인기 있는 축구인을 앞세워 분노한 여론을 달래는 방패막이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깜짝 선임이지만 홍명보와 박지성, 두 사람 모두 원했던 길을 걷게 됐다는 게 중론이다. 홍명보 전무는 일찌감치 행정가를 꿈꿨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8개월 앞두고 긴급 선임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요청으로 코치를 맡은 뒤 20세 이하 대표팀, 런던올림픽 대표팀, 브라질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서 지도자의 길을 걸었지만 현역 은퇴 후 밝혔던 최초 목표는 행정가였다.

 

선수와 지도자에 전념했던 만큼 전무로서 짊어져야 할 일반적 행정 업무에는 전문성이 약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2002 월드컵 성공의 숨은 주역인 가삼현 전 사무총장(현 현대중공업 사장)이 떠나며 사라졌던 직위를 8년 만에 부활시켰다. 협회 내부에서 차곡차곡 경험을 쌓은 전한진 사무총장이 협회 운영의 내치를 맡고, 홍명보 전무는 현안에 대한 방향 제시, 현장과의 소통과 범축구계 여론 수렴 등 외치에 더 집중한다.

 

 

현재는 홍명보에게, 미래는 박지성에게

 

브라질월드컵에서의 실패와 의리 축구 논란으로 한국을 떠나 중국에서 감독 생활을 해 왔던 홍명보 전무가 행정가로 복귀한 것에는 모두가 놀란 모습이다. 대부분 기술위원장 선임 가능성 정도를 예상했던 터였다. 홍명보 전무는 “나도 정몽규 회장의 연락을 받고 처음엔 놀랐다. 한국 축구가 위기에 처했고, 변화의 방향에 공감해 긴 고민 없이 수락했다”고 말했다.

 

박지성 본부장 역시 일찌감치 지도자에 대한 생각을 접고 행정가로 활동하기 위한 준비를 해 왔다. 유럽 무대에서 10년 넘게 맹활약하며 선진 축구 시스템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해 왔다. 2014년 현역 은퇴 후 국제축구연맹(FIFA)이 행정가 육성을 위해 운영하는 FIFA 마스터 과정을 이수했다. 당초 유럽이나 아시아축구연맹(AFC)과 같은 국제무대에서 시작하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있었지만 그 역시 국내에서 행정가로서 첫발을 내디딘다.

 

박지성 본부장이 맡게 되는 유스전략본부는 기존 기술위원회에서 세분화된 신설 파트다. 한국 축구의 미래가 달린 유소년 선수들을 발굴·육성하기 위한 장기 로드맵과 전략을 짠다. 박지성 본부장을 중심으로 유스연구팀이 배치된다. 협회의 새 조직 체계상 유스본부장의 위상은 부활한 사무총장과 동급이다. 초보 행정가지만 그만큼 그의 경험과 준비를 믿고 중책을 맡긴 것이다.

 

축구협회는 그동안 ‘골든 에이지’ 프로그램을 도입했지만 여전히 정책의 수혜자가 극소수 엘리트 선수에게만 향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유럽의 시스템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박지성 본부장은 축구 저변을 확대하고 유망주 풀을 넓힐 수 있는 한국형 발전 방안 제시를 책임진다.

 

축구협회의 당면 과제는 내년 6월 열리는 2018년 러시아월드컵이다. 이 대회를 위해 대표팀 총력 지원이 우선된다. 홍명보 전무도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원을 1차 과제로 삼고 있다. 11월16일 축구협회 임시총회를 통해 승인 절차를 마무리한 홍명보 전무는 매일 축구회관에 출근하는 상근직이다. 생애 처음으로 회사원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 축구의 현재를 홍명보 전무가 담당한다면 박지성 본부장은 미래를 그린다. 비상근직인 그는 유럽과 한국을 부지런히 오갈 계획이다. 박지성의 이름값에 기댄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만큼 독립성을 가질 수 있다. 축구협회 내부 관계자는 “유스 전략은 대표팀 성적과 관계없이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일관성 있게 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박지성 본부장은 원하는 바를 관철하고 지원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축구협회는 유소년 전용 축구센터 건립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대표팀의 부진으로 기술위원회가 교체되고, 여론의 눈치를 보며 진척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박지성 본부장은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 설 것으로 보인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2002년 한·일월드컵의 두 영웅은 다시 파고에 흔들리는 한국 축구의 중심에 섰다. 홍명보 전무와 박지성 본부장은 자신들의 등장이 스타 마케팅을 통한 일시적 위기 극복이 아닌 세대교체와 구태 청산으로 한국 축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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