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 절벽에 부닥친 개미들, 비트코인 좀비로 변신
  • 서지혜 서울경제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2.15 17:38
  • 호수 1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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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규제만이 능사 아냐…건전한 투자문화 조성이 우선”

 

12월초 한 기업의 익명 게시판 애플리케이션(앱) ‘블라인드’에는 ‘모 대기업에서 동료가 비트코인으로 20억을 벌고 퇴사했다’는 내용의 투자 성공기가 게재됐다. 11월까지 900만원대였던 비트코인 가격이 1000만원을 넘어설 무렵이었다. 진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비슷한 성공담은 계속 나왔고, 대학생·주부·고령자에게까지 전해졌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생전 처음 듣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같은 가상화폐에 자신의 등록금·월급·보증금 등 자산을 투척하기 시작했다.

 

환상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12월7일 저녁, 언론을 통해 “정부가 가상화폐 거래를 전면 금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장주 비트코인의 시세는 고꾸라졌다. 7일 비트코인은 1BTC당 2300만원이었지만, 주말인 8~9일 사이 1700만원으로 폭락했다. 분노한 투자자들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가상화폐 전면 금지를 반대하는 청원을 제기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파급이 커지자 정부는 결국 시장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정부는 12월13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홍남기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가상화폐 관련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열어 △신규 투자자의 무분별한 시장 진입에 따른 투기 과열 방지 △가상통화를 이용한 불법행위 엄단 △관리 사각지대에 놓인 가상화폐 거래소 감시 등을 골자로 하는 긴급 대책을 내놓았다. 가상화폐 거래를 사행성 투기, 포르노 등에 비유하며 ‘전면 금지’를 주장하던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난 셈이다.

 

12월11일 미국 시카고 옵션거래소가 비트코인 선물 거래를 시작했다. © 사진=AP연합

 

한국 비트코인 가격, 미국보다 10% 높아

 

하지만 이번 정부 대책은 여전히 비트코인 광풍의 본질을 정확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낳고 있다. 가상화폐 가격은 미국에서 비트코인이 제도권에 편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본격적으로 상승했다. 12월11일 시카고 옵션거래소(CBOE)는 비트코인 선물 거래를 시작했다. 대형 금융기관에서 최초로 관련 상품을 제도권에 상장하면서 가상화폐의 자산가치가 인정됐다는 평가가 이어졌고, 선물시장 상장을 앞두고 비트코인 가격이 전에 없이 올랐다. 한국 비트코인 가격은 미국 가격과 비교해 10% 안팎으로 높아 ‘김치 프리미엄(코리아 프리미엄)’으로 불린다. 투자 규모가 크다 보니 시세도 높게 형성되는 것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전 세계 가상화폐 거래량의 20% 이상을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1월까지 국내 최대 거래소 중 하나인 ‘빗썸’에서만 약 56조원이 거래됐으며, ‘업비트’ ‘코인원’ 등 다른 주요 거래소의 거래액까지 감안하면 막대한 자금이 가상화폐에 투입된 셈이다.

 

한국의 가상화폐 열기는 세계적 관심사다. 세계 최대 온라인 거래회사 IG그룹의 크리스 웨스턴 수석전략가는 “전 세계적으로 천문학적인 이익이 난 비트코인은 역사상 보기 드문 시장 중 하나”라며 “아시아의 개인투자자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것은 마치 전체가 펀드매니저와 같은 해박한 금융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끌려가는 것 같다”고 관측했다. 월스트리트저널 역시 “한국과 중국에서 개인의 부는 증가했지만, 부동산 가격이 너무 비싸고 증시도 고평가된 상황에서 비트코인에서 투자 기회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며 “전자상거래·모바일 결제 환경에서 자라난 아시아의 젊은 세대들이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 개념을 친숙하게 여기는 것도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분석은 올해 국내 증시를 보면 일견 들어맞는다. 실제로 올해 코스피 지수는 약 30% 상승했지만, 개별 종목별로 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비싼 주식’만 주가가 올랐다. 개인투자자가 90%에 달하는 코스닥은 10월까지도 지루한 박스권을 이어가다 최근 두 달 사이 급격하게 상승한 후 다시 약세를 나타내고 있다. 증시는 호황이었지만, 개미투자자들이 돈을 벌기 어려운 구조다. 또한 정부가 부동산시장의 대출 규제를 강화하면서 섣불리 투자에 뛰어들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상화폐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로 부상했다는 분석이다.

 

정부의 규제 여부와 관계없이 전 세계 가상화폐의 상품 가치는 향후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가상화폐가 화폐를 대신하기보다는 파생상품의 일부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자산시장에서 금과 같은 안전자산 역할을 할 것이란 평가다. 한국투자증권은 최근 발행한 리포트에서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이라는 장부를 바탕으로 비트코인 소유권을 이전시키는 결제 시스템”이라며 “발행량이 제한돼 있어 금과 같은 희소성을 지니는 만큼 인플레이션 헤지를 기대할 수 있고, 송금 수수료가 낮아 개인 간 해외송금 시장을 대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오른쪽 세번째)이 12월1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상화폐 관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가상화폐도 공시 기능 강화 방향으로 가야”

 

때문에 한국 정부가 가상화폐 거래를 단순한 사행성 투기로 바라보고 규제를 내세워도 시장은 커질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실제로 지난해 영국 ‘브렉시트’ 당시에도 투자자들은 안전자산으로 금 대신 가상화폐를 택했다. 가상화폐 열풍을 일시적인 상황으로 보기 어려운 까닭이다. 임혜윤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비트코인은 11월초 하드 포크(기존 블록체인과 분리한 새로운 블록체인에서 암호화폐를 만드는 것) 논란으로 20% 이상 하락했다가 우려를 딛고 재차 반등했다”며 “이는 비트코인 가격이 일정 수준에서 지지될 정도로 확고해졌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 가격 하락을 유발할 만한 이슈가 발생하더라도 존폐를 논할 정도의 가격 급락이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런 이유로 무조건 규제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IT 전문가들은 이번 대책에서 ICO(가상화폐 공개)를 금지한 데 대해 유감을 표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ICO는 스타트업이 엔젤투자자나 벤처캐피털에 사업 계획을 설명하고 투자를 받는 것과 유사한 행위로, 선진국에서는 이미 벤처기업의 자금 조달원으로 ICO가 엔젤투자를 앞서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처럼 시장이 열리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투자문화 개선도 절실하다. 비트코인 가격은 영원히 상승하지 않는다. 블룸버그는 실제로 비트코인 가격이 하드 포크로 인한 과도한 분열, 중앙은행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규제, 해킹으로 인한 거래소 피해 등의 이유로 붕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하루에도 시세가 20~30%를 수차례 오가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무분별하게 단타 투자를 지속한다면 ‘가상화폐=사행성’이라는 정부의 인식은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오 교수는 “일본과 같이 거래소 안정성 제고와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도 구축이 필요하다”며 “성급한 금지보다는 일반투자자들도 가상화폐 공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가상화폐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공시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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