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산업스파이 때문에 홍차 종주국 운명 뒤바뀌다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ec@sisajournal.com)
  • 승인 2017.12.25 01:41
  • 호수 147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도 다르질링 홍차가 세계 3대 홍차 된 이유

 

홍차는 비(非)발효차인 녹차와 대척점에 있는 완전 발효차다. 세계 최초의 홍차 정산샤오종(正山小種)이 태어난 중국 푸젠성(福建省) 우이산(武夷山)시 싱춘(星村)진 퉁무관(桐木關)을 찾았다. 퉁무관은 1999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된 우이산 구곡계곡 끝자락에 숨어 있는 오지다. 국가급자연보호구로 지정된 퉁무관 일대는 신사의 나라 영국이 보낸 산업스파이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1812〜1880)이 1848년부터 3년에 걸쳐 은밀하게 벌인 차나무 불법유출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로 사전 허가를 받지 못한 외국인은 아직도 출입할 수 없다. 차 생산국가도 아닌 영국이 원산지 중국을 제치고 전 세계 홍차 문화와 시장을 주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이 독점해 왔던 차를 인도에서 생산해 세계 차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19세기 영국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의 야망에서 시작됐다.

 

퉁무관의 한 차밭

 

푸젠성 퉁무관, 산업스파이 트라우마 여전해

 

1600년 12월31일 엘리자베스 1세 여왕 특허를 받아 조직된 영국동인도회사는 동아시아와 인도 무역독점권을 허가받은 칙허기업(勅許企業)으로서 1680년대부터 징병권과 교전권을 부여받은 제국주의 첨병이었다. 1757년부터 청나라가 유일하게 무역을 허가한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 항구를 통해 홍차를 수입하던 영국동인도회사는 누적된 무역적자를 뒤집기 위해 공식 결제수단인 은 대신 인도에서 제조한 아편으로 지불했다. 부패한 청나라 관리와 결탁한 아편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청나라 은이 오히려 유출됐다.

 

아편에 중독돼 죽거나 폐인이 되는 사람이 거리에 넘쳐났지만 아편 제조와 전매권을 갖고 있는 영국동인도회사는 수익 극대화를 위해 아편이 몰고 온 폐해를 외면했다. 청나라 관료사회는 물론 군인 80%가 아편 중독자였다는 기록도 있다. 아편전쟁으로 알려진 1차 중영전쟁에서 완승한 영국은 광저우 외 다른 항구와 중국 내륙에서도 상거래를 하려던 목적을 달성했지만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에 부딪혔다. 수입 아편에 의존하던 청나라 유통조직이 양귀비를 대량 재배해 불법 제조한 아편을 유통시켰다. 헐값이 된 아편으로 더 이상 비싼 차를 살 수 없게 된 영국동인도회사는 홍차 수입전략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청나라에서 홍차를 수입하는 대신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직접 홍차를 생산해 자급자족과 세계시장 진출을 목표로 세운 영국동인도회사는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플랜A는 브루스(Bruce) 형제가 차나무를 발견한 인도 아삼 지역에서 차나무를 키워 홍차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1778년 조지프 뱅크스(Joseph Banks)가 인도에서 차를 재배할 수 있다고 처음 주장했지만,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동인도회사는 이 정보를 한동안 무시했다. 청나라와 정치적 긴장감으로 홍차 수입에 불안요소가 커지면서 1835년 찰스 알렉산더 브루스(CA Bruce)를 주축으로 차위원회를 구성했다.

 

퉁무관에 잠입한 로버트 포춘(오른쪽 세 번째)과 조력자들 © 서영수 제공

1838년부터 인도 아삼 지역에서 소량의 홍차를 시험 생산했지만 차나무 재배기술과 홍차 제조기술에 무지했던 브루스가 만든 홍차는 1848년 1월까지도 중국 홍차와 거리가 먼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다. 딜레마에 빠진 영국동인도회사는 차나무 해외반출이 엄격하게 금지된 청나라에서 차나무와 종자를 훔쳐오는 플랜B를 실행했다. 숙달된 식물 사냥꾼이 필요했던 영국동인도회사는 살아 있는 해외식물 이식 경험이 많은 영국왕립정원협회 소속 식물학자 로버트 포춘에게 고액연봉과 비용지급은 물론 위험수당으로 중국에서 가져오는 식물에 대한 로열티 지급을 약속하며 차나무를 훔쳐 인도로 보내는 ‘식물 사냥꾼’ 임무를 부여했다.

 

약용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조성한 런던 첼시 피직 가든(Chelsea Physic Garden) 수석원예사로 근무하던 로버트 포춘은 1843년부터 3년 동안 왕립원예학회 후원을 받아 식물학자로서 중국 대륙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1848년 9월 상하이에 도착한 로버트 포춘은 청나라 관리 복장과 변발로 위장하고 중국 최고 홍차 생산지 우이산에 잠입했다. 우이산 퉁무관에서 생산되는 정산샤오종은 영국에서는 랍상 소우총(Lapsang Souchong)으로 불리며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최고급 홍차였다. 만리장성 너머 북방에서 온 고위관료로 위장한 로버트 포춘은 동행한 청나라 조력자 덕분에 별다른 의심 없이 퉁무관을 지키는 청나라 군사 눈을 피할 수 있었다. 1만3000그루가 넘는 차나무 묘목과 종자를 구해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돌아왔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최고 발명품으로 인정받은 워디언 케이스(Wardian Case·휴대용 유리온실)에 안전하게 묘목과 종자를 실어 인도로 보낸 로버트 포춘은 황당한 소식을 접했다. 홍콩에서 인도로 직행해야 할 배가 스리랑카로 우회해 갔을뿐더러 인도 제1 항구 콜카타에 도착한 워디언 케이스를 난생처음 본 세관원이 뚜껑을 모두 열어 묘목을 확인하고 주면 안 되는 물까지 주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영국동인도회사 소속 캠벨 박사가 기다리는 다르질링(Darjeeling)에 도착한 묘목은 곰팡이에 오염된 채 겨우 1000그루만 살아남았지만 이식 후 활착에 실패했다. 다행히 씨앗 80개를 살려 종자배양실에서 증식시킬 수 있었다.

 

퉁무관에 다시 밀파된 로버트 포춘은 차나무 묘목 2만 그루와 종자를 구해 정크선에 실어 상하이로 운반했다. 차나무를 재배하는 기술과 제조기술을 스님에게 전수받은 로버트 포춘은 차 제조에 필요한 도구까지 구했다. 퉁무관에서 홍차 제조기술자 6인을 포섭하고 상하이에서 기술자 2명을 더 구해 묘목과 함께 아일랜드퀸호에 탑승시켜 1851년 인도로 보냈다. 중국산 차나무 1만2828그루가 해발 2045m 다르질링 고원지대에 뿌리내렸다. 캠벨 박사의 노력으로 종자에서 발아한 새싹도 대량증식에 성공했다. 1860년부터 상업적 가치를 가진 다르질링 홍차가 출시됐다. 곧이어 브루스가 고군분투하던 인도 아삼 지역에서도 아삼종 홍차가 대량생산돼 영국으로 수출됐다. 청나라가 독점하던 홍차 신화가 깨졌다.

 

세계 최초의 홍차 정산샤오종

 

중국산 차나무·기술로 다르질링 홍차 만들어

 

세계 3대 홍차로 사랑받는 다르질링 홍차는 로버트 포춘이 밀반입한 중국산 차나무와 중국인 기술자로부터 출발했다. 영국동인도회사를 만족시킨 로버트 포춘은 차 산업에 진출하려는 미국 특허사무소와 차나무 밀반출을 위한 비밀계약을 맺고 1858년 3월4일 다시 우이산 퉁무관으로 향했다. 6개월에 걸친 작업으로 미국에 차나무를 보냈지만, 미국은 남북전쟁에 휩싸이며 차 산업을 포기했다. 북미대륙 유일한 상업용 차 생산농장이 있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티 팜(Charleston Tea Farm)에서 자라는 차나무 조상 일부는 로버트 포춘이 퉁무관에서 불법 채집한 차나무다.

 

외국인 무단출입을 통제하는 퉁무관 검문소를 지나면 외국인에 대한 주민들의 경계심은 찾기 어려웠다. 차나무와 차를 만드는 기술이 모두 없었지만 차 산업에 뛰어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불태운 영국동인도회사에 의해 홍차는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와 아프리카 케냐 등지에서 대량생산된다. ‘홍차는 영국’이라는 인식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