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제로 시대’ 선언의 역설
  • 이민우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8.01.03 15:06
  • 호수 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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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발 수위 높이는 노동계 “자의적 해석으로 정규직 전환 제외 속출”

 

“저는 임기 중에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우선 공공부문에서 임기 내에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 (중략) 납득할 만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전부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삼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 직후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다.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을 없애 민간까지 정규직 전환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였다. 외환위기 이후 고용불안과 저임금, 차별적인 처우에 시달리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통령의 한마디로 기대감에 부풀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12일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잡음이 발생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정부와 노동계의 엇갈린 시선

 

하지만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이상과 꿈은 컸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7개월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공공부문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정규직 일자리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다. 정부의 태도도 사뭇 달라졌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뒤늦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모든 비정규직을 없애겠다는 것이 처음부터 아니었다”고 한 발 뺐다. 고용노동부는 “상시·지속적 업무 종사자 외의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 대상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정부와 노동계의 시선은 엇갈리고 있다.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정규직 전환 심의위원회를 두고 ‘해고 심의위원회’라는 말까지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2017년 7월20일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고용부에 따르면, 공공부문 852개 기관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31만여 명(기간제 19만1000명, 파견·용역 12만1000명)이다. 10월28일엔 공공부문 연차별 전환계획을 발표하고 2020년까지 상시·지속적 업무에 종사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20만50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2017년 말까지 7만40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방침이었다. 하지만 목표치 달성은 불투명해졌다. 11월27일 기준 정규직으로 전환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는 기간제 1만5652명(143곳), 파견·용역 2580명 등 1만8232명에 불과했다. 2017년 목표 달성률은 기간제 30.7%, 파견·용역 11.2%에 그친다.

 

그런데도 고용부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고용부는 “정규직 전환 심의위원회가 89% 기관에서 구성됐다”며 “지방자치단체와 일부 공공기관에서 갈등이 표출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전체 전환 대상 기관 835곳 가운데 743개 기관에서 전환 심의위 구성이 완료됐다. 파견·용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노·사·전문가협의회도 190개 기관에 설치됐다.

 

하지만 곳곳에서 꼼수가 발생하고 있다. 정규직 전환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인 ‘상시·지속적 업무’에 대한 해석이 임의적으로 이뤄지고 있어서다. 대한석탄공사는 산업 수요 변화를 이유로 굴진·채탄·발파·운반·선로보수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 1109명을 전환 대상에서 제외했다. 한국가스기술공사는 설계직종을 정규직 전환 예외로 분류하면서 프로젝트성 사업, 고도의 전문직, 일시적·간헐적 업무라는 이유를 들었다.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는 “설계직종은 반복적인 프로젝트 사업에 해당하고, 고도의 전문직도 아니다”며 “재심의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2017년 9월11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교육부 정규직 전환 심의위 결정에 대한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 사진=연합뉴스

 

‘해고 심의위’ 된 정규직 전환 심의위

 

인천공항공사는 파리바게뜨의 사례처럼 자회사를 만들어 비정규직들을 흡수하려고 하다가 홍역을 치렀다. 인천공항공사가 연구용역을 맡긴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은 854명을 공사가 직접 고용하고 8984명을 자회사에서 고용하는 최종안을 제시했다. 반면 다른 연구용역 업체인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4504명을 직고용, 3589명을 자회사 고용으로 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3000명을 직접 고용하고, 나머지 7000명은 자회사에서 고용하는 방식으로 정리됐다. 정부의 정규직화 가이드라인 중 ‘생명·안전 업무’를 어디까지 볼지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생긴 탓이다.

 

서울시에선 상시·지속 업무를 9개월 이상 계약하면 무기계약직 전환 대상이 되기 때문에 8개월20일을 계약 기간으로 정하는 꼼수까지 등장했다. 서울시 산하기관인 서울대공원, 중부·동부·서부공원녹지사업소, 서북병원, 서울로운영단 등은 2012년 9개월 단위로 채용하던 기간제 노동자들을 2013년부터 현재까지 8개월20일 단위로 계약했다. 문 대통령에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기간제 노동자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라는 지침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규직 전환 논의가 완료되기 전 기간만료를 이유로 해고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 심의위원회의 운영 방식과 결정 내용에 대해서도 잡음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17개 시·도 교육청의 정규직 전환 심의위는 학교 비정규직 8만여 명의 정규직 전환 여부를 심의한다. 현재까지 8000여 명은 정규직 전환자로 결정됐고, 2만5000여 명은 전환 제외 직종으로 분류됐다. 정규직 전환 대상자보다 제외 대상자가 4배에 달하는 셈이다. 초단시간 돌봄 전담사, 도서관 개관연장 실무원·학습 상담사, 운동부 지도자 등을 전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일부 교육청은 심의위가 정규직 전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할 경우 계약기간 만료 시점에서 계약을 종료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사실상 ‘해고 심의위’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학교비정규직노조가 집계한 시·도 교육청별 정규직 전환 심의위 현황에 따르면, 울산·대구를 제외한 15개 교육청에서 심의위 회의를 2~5회 진행했다. 울산시와 대구시 교육청은 심의위가 종료됐다. 대구시교육청의 경우 심의 대상 4276명 가운데 78%에 달하는 3364명을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대구 지역의 한 학교에서 2009년부터 사서로 근무한 A씨는 매년 실무원·보조원·업무보조원 등 명칭만 바꿔가며 일했다. 그는 “10년 동안 일했는데 지금 와서 한시 사업이라는 이유로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제외했다”며 “사서 자격증까지 보유하고 있는데 보조 업무, 한시적 업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노동계에선 정규직 전환 심의위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본부는 “정규직 전환 심의위가 비민주적으로 밀실에서 심의를 하고 있다”며 “심의 대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속출해 비정규직 집단 해고가 예상되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안명자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본부장은 “어떤 직종이 어떤 방향으로 심의되는지 전혀 알 수 없고, 심의위원조차 당일 교육청이 준비한 자료를 받아 그 자리에서 전환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며 “전환 심의위 구성부터 전면 재조정해 직종별 고용안정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2017년 12월8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 관계자들이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성과급제 폐지 등을 주장하며 파업 출정식을 가졌다. © 사진=연합뉴스

 

노무현 정부의 트라우마, 文 정부는 다를까

 

각 시·도 교육청은 전환 심의위 논의 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비공개 회의를 원칙으로 심의위원들에게 비밀유지서약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회의자료 사진 촬영과 메모도 금지했다. 노조는 “교육청별 심의위원 10여 명 가운데 노조 추천 인사가 20~30%에 불과해 당사자 입장을 대변하는 위원들이 소수”라며 “비정규 노동자들은 정확한 결정 과정을 모른 채 불안에 떨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공운수노조는 “많은 기관이 노골적으로 정규직 전환 추진을 지연하고 임의적인 지침 해석으로 상시·지속 업무 여부를 판단하는 등 정규직 전환을 최소화하려는 꼼수 행태를 보였다”며 “정규직 전환 최소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중앙정부 차원에서 감독하라”고 촉구했다.

 

현재 집권여당에는 과거 참여정부 초기 노동계의 극심한 저항으로 국정 운영에 제동이 걸린 선례가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참여정부 출범 첫해 철도 파업과 화물연대 파업이 발생해 노동계와 갈등을 빚었다. 일자리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비정규직 보호법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와 달리 노동계와 우호적인 관계에서 출발했다. 노동계의 요구를 대폭 수용했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하며 손을 내밀었다. 노동계도 이에 호응하며 대정부 투쟁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노동계의 투쟁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전교조는 ‘법외노조 철회’를 요구하며 2017년 12월15일 연가투쟁을 벌였다. 11월28일에는 건설노조가 건설근로자법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며 서울 여의대로 10개 차로와 마포대교 남단을 한 시간 가까이 점거했다. 노동계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석방, 근로시간 단축, 연장근무 중복할증 폐지 등을 놓고 여권과 점차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노동계와의 갈등이 지속되면 노사정위원회를 복원해 노사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문 대통령 구상도 어그러진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기대감이 컸던 만큼 실망이 더욱 커질 수 있다”며 “물론 현 정부가 지난 정부에 비해 노동 친화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정서는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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