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김정은의 ‘평창’ 승부수 남북관계 ‘과속스캔들’ 치닫나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1.05 18:52
  • 호수 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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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잇단 파격 제안…한국은 ‘대환영’ 미국은 ‘신중론’​

 

김정은의 신년연설이 새해 벽두부터 남북관계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1월1일 북한TV로 중계된 30분 분량의 신년사에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평창 겨울철 올림픽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전격적인 그의 제안 후 남북 직통전화가 재가동됐고, 당국 간 대화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설 명절(2월16일)을 계기로 한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 당국 간 고위급 회담 가능성까지 점쳐지는 등 과열 조짐까지 보인다. 마치 남북관계가 김정은 신년사 전과 후로 나뉘는 듯한 분위기다.

 

핵과 평창을 앞세운 김정은 신년사는 정교하게 준비된 느낌을 준다. 워싱턴을 향해선 ‘북한=핵 보유국’이란 메시지를 던졌고, 서울 쪽으론 ‘올림픽=평화’라는 시그널을 보냈다. 무엇보다 평창겨울올림픽 개최에 공을 들여온 문재인 정부가 거부하기 어려운 카드를 던진 점이 눈길을 끈다. 김정은이 직접 신년사를 통해 평창올림픽을 언급했다는 점도 파격적이다. 새해 들어 남북관계를 대화 쪽으로 몰아 평화공세를 취할 것이란 전망은 있었지만 김정은의 입을 통해 전격 제안하는 수준까진 예측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북한 주민들이 모두 듣고 보는 TV연설을 통해 ‘남조선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점을 언급한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 같은 김정은의 제안에 문재인 대통령이 즉각 의기투합함으로써 남북관계는 급물살을 타는 형국이다. 청와대가 김정은 신년사에 환영의 뜻을 밝힌 건 북한 발표 6시간40분 만인 1월1일 오후다. 이튿날엔 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북한 대표단의 평창올림픽 파견과 남북 당국회담 뜻을 밝힌 것은 평창올림픽을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의 획기적인 계기로 만들자는 우리의 제의에 호응한 것으로 평가하며 환영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7월 베를린 선언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대화 호응을 요구한 데 대해 북한이 화답했다는 취지다.

 

조속한 후속조치를 취하라는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같은 날 기자회견을 통해 “(1월)9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고위급 당국 간 회담을 하자”고 제의했다. 하루 뒤인 3일 이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이 직접 북한 관영매체를 통해 판문점 통신 채널 복원 방침을 알리면서 북한 대표단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위한 본격적 소통과 교감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월1일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文 “우리 제의에 북한이 화답한 것”

 

현재 분위기라면 일단 북한 대표단의 평창행은 성사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이를 공언한 데다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이고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점에서다. 정부가 지나치게 대화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대북 접근을 서두른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비판여론이 힘을 얻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라는 성격에다 ‘평화 올림픽’을 염원하는 국내외 목소리가 이미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평창 참가가 올림픽 기간 중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건 분명한 것 아니냐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북한이 대표단을 보내놓고 호전적 행보를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는 점과 김정은이 ‘성공 개최’를 공언했다는 측면에서다.

 

하지만 정부는 내심 고민이 크다. 가장 꺼림칙한 부분은 김정은이 한·미 합동군사연습 중단 문제를 들고나왔다는 점이다. 그는 “외세와의 모든 핵전쟁 연습을 그만둬야 한다”며 우리 정부를 압박했다. 한·미가 군사연습 연기에 무게를 둔 데 반해 북한은 아예 ‘중단’을 요구할 기세라는 점도 남북 간의 확연한 눈높이 차이를 드러낸다. 그동안 “남조선 것들 쓸어버리라”는 등의 북한 극언 때문에 등을 돌려버린 국민들의 대북 감정을 다시 추스르는 것도 쉽지 않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이 87년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테러를 저질렀던 점은 우리 국민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김정은의 과거 신년사가 구두선에 그친 경우도 많다는 것도 정부로선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유엔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공을 들이고 있는 대북제재가 중대 고비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 북한과의 대화 쪽으로 유턴하는 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북한과의 대화나 경협·교류에 합의할 경우 대북제재 그물망을 걷어내지 못하면 허사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일단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남북대화에 힘을 실어주려는 움직임이다. 김정은 신년사 발표 직후인 1월2일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북한 신년사를 듣고 안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연휴 동안 샴페인을 너무 마셔서 그런 것”이라며 한·미 간 인식차를 보여줬다. 하지만 문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이 1월4일 전화통화에서 평창올림픽 기간에 합동군사연습을 실시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등 보조를 맞추는 모양새다.

 

 

김여정, 평창올림픽 北 대표단장 가능성

 

김정은은 신년사에 이어 또 다른 깜짝 카드를 준비할 공산이 크다. 대표단장으로 자신의 여동생 김여정을 보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하거나 모란봉악단 등 예술단을 보내 흥행바람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이후 김정은이 내밀 대남 청구서가 무엇일지도 주목된다. ‘남조선 잔칫상을 빛내줬다’는 논리를 내세워 북한은 향후 대화에서 우리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해 올 가능성도 크다. 한·미 합동군사연습 완전 중단이나 항공모함이나 전폭기 등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순환배치 중단 등은 대표 아이템이다. 개성공단 재가동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등 경협카드도 만지작거릴 수 있다.

 

신년사 이벤트를 활용해 김정은은 연초 서울과 워싱턴을 뒤흔들어대는 데 일단 성공했다. 약발이 먹힌다고 판단할 경우 한·미 공조를 깨트릴 추가 카드를 고려할 가능성도 있다. 우리의 대책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대북 전문가들은 “핵과 미사일 도발을 일삼은 지난해는 상대적으로 대처가 더 쉬웠다”고 지적한다. 도발 일변도로 나오기보다 대화공세를 결합한 양동작전이 더 대응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집권 7년 차에 접어든 김정은을 상대로 한 수읽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김정은의 말보단 그의 행동과 발걸음을 주시하면서 신중한 대북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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