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의 근원에 茶가 있었다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1.12 13:42
  • 호수 147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와 아편이 맞물려 충돌한 중화주의와 제국주의

 

차(茶)와 전쟁. 얼핏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라고 믿었던 청나라를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아편전쟁의 근원에 차가 있었다. 영국 식민지로 안주했던 미국이 독립전쟁을 시작한 계기도 42톤에 달하는 차를 바다에 쏟아버린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가 단초였다. 전통적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젖은 중화주의(中華主義)와 자본주의를 앞세운 제국주의(帝國主義)가 충돌한 아편전쟁은 차 수입으로 발생한 무역적자를 아편 밀수출로 만회하려는 영국의 야욕에서 비롯된 전쟁이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잠자는 용에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178년이 지난 2017년 10월18일, 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개막식에서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은 3시간24분 동안 연설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32차례 언급했다. 10월24일 폐막연설에서 “중국 공산당은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을 인솔해 완강히 투쟁함으로써 아편전쟁 이후 온갖 능욕을 당하던 옛 중국의 암담한 처지를 완전히 바꿨다”고 선포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또다시 강조했다.

 

중국 둥관시 후먼에는 아편을 흘려보낸 그 자리에 부러진 아편 흡연 도구 상징물이 서 있다. © 사진=서영수 제공

 

시진핑 “아편전쟁의 능욕, 완전히 바꿨다”

 

아편전쟁의 도화선이 된 호문소연(虎門銷煙)은 1839년 6월3일부터 25일까지 23일 동안 광둥성(廣東省) 후먼(虎門)에서 청나라 흠차대신(欽差大臣) 임칙서(林則徐)가 서양 상인에게 압수한 2만여 개의 아편 상자를 석회로 용해시켜 바다로 흘려보내며 아편 흡입과 매매를 불법으로 각인시킨 사건이다. 필자는 후먼샤오옌 역사현장을 찾아 광둥성 광저우(廣州) 바이윈(白雲)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둥관(東莞)시를 향해 차로 1시간 정도 이동했다. 광저우와 이어져 있는 둥관시 후먼에는 아편전쟁박물관과 후먼해전박물관이 있다. 1·2차 아편전쟁을 기념하는 두 박물관은 규모와 전시 내용에 큰 차이가 없었다. 광저우와 둥관을 이어주는 후먼대교 옆에 있는 아편전쟁박물관에는 1839년 아편을 폐기했던 자리에 임칙서가 동상으로 남아 남중국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838년 7월10일 임칙서가 올린 상소문을 읽은 청나라 제8대 황제 선종(宣宗)은 그를 자금성(紫禁城)으로 불렀다. 1836년 5월17일 허내제(許乃濟)가 “아편 무역과 흡연을 일부 허용해 기축통화인 은(銀) 유출을 막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조세수입도 늘리자”고 주장한 이금(弛禁)정책이 청나라 조정에서 대세였지만, 선종은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편 밀수를 막기 위해 아편 무역을 합법화한다는 것은 청나라 통치이념인 유교적 도덕주의와 민본주의에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선종은 아들 셋을 아편 중독으로 잃었던 아픔과 자신도 아편을 흡연했다가 끊은 과거가 있었다. ‘아편을 엄금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쓴 임칙서도 아편으로 고통받다가 죽은 친동생이 있었다. 중국인이 지금도 가장 싫어하는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말이 이 무렵 생겨났다.

 

중국의 아편 중독 피해자들 모습(위쪽 사진)과 아편전쟁박물관 © 사진=서영수 제공

 

청나라를 대표하는 청백리였던 임칙서는 18세부터 관직에 들어와 52세에 총독이 된 유능한 관료였다. 한학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서구문물을 배워 중화주의를 넘어 시야를 전 세계로 넓힐 것을 주장한 신지식인이기도 했다. 아편 흡연자를 모두 사형시켜야 한다는 무자비한 강경론자와 달리, 아편 중독자를 범법자로 처벌하기에 앞서 환자로서 나라가 우선 구제해야 한다는 신선한 논리를 폈다. 수많은 아편 흡연자 단속보다 광저우에서 횡행하는 아편 밀무역을 먼저 근절해야 아편 유통을 막을 수 있다는 제안은 선종이 원하는 방안이었다. 19차례에 걸친 특별 알현을 통해 황제의 신임을 받은 임칙서는 1838년 12월31일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광저우로 향했다.

 

임칙서는 광저우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편 밀거래와 연관된 주요 인물 17명을 긴급 체포할 것을 양광총독(兩廣總督) 등정정(鄧廷楨)에게 지시했다. 1839년 3월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가 석 달 동안 체포한 아편 밀거래업자와 비리에 연루된 관리는 지난 3년간 체포된 인원보다 5배나 많았다. ‘앞으로 아편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서양 상인들에게 받은 임칙서는 서양 상인들이 숨겨둔 아편을 압수하며 한 상자에 5근의 차로 보상해 줬다. 미국과 포르투갈 상인들은 순순히 협조했지만, 영국 무역감독관 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이 지휘하는 영국 상인들은 아편은 몰수당하면서도 서약서 제출은 거부했다. 임칙서가 압수한 1426톤의 아편을 전량 폐기해 버린 단호한 행동을 목격한 엘리엇은 ‘영국인의 사유재산(아편) 보호를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고했다.

 

임칙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친필로 외교문서를 써서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냈다. 중국에서 불법인 아편 유통의 부당함과 아편 중독의 심각한 폐해를 밝히며 ‘역지사지’를 호소했다. 아편을 제외한 무역에 최혜국대우를 제안했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한다”는 황당한 이유로 거절당했다. 영국도 아편 밀무역의 부도덕함을 알고 있었지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 중국차 수입으로 발생하는 무역 역조를 뒤집어야만 했다. 1689년 중국차를 처음 수입한 영국은 1837년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차가 중국에서 수입하는 전체 품목의 90%를 넘어섰다.

 

아편을 막았던 임칙서의 동상은 중국 각지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 사진=서영수 제공

 

중국차는 1662년 찰스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결혼예물로 차를 가져오면서 영국 왕실에 알려졌고, 산업혁명과 함께 신흥 부르주아가 상류사회를 이끌면서 차 문화를 확산시켰다. 공장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티 브레이크’를 만들어 휴식시간에 노동자들에게 차를 제공했다. 전 국민이 고급문화가 아닌 생활필수품으로 차를 매일 마셨다.

 

중국차 수입량은 엄청나게 늘었지만 중국에 수출할 마땅한 품목은 없었던 영국은 인도 파트나(Patna)에서 1818년부터 대량 제조한 아편 밀수출이 유일한 답이었다. 찬반이 분분했던 영국 의회는 1840년 4월 중국에 대한 원정군 파견을 승인했다.

 

1840년 6월 4000명의 병사를 태운 47척의 영국 함대가 광저우에 나타났다. 임칙서의 강력한 방어태세를 확인한 영국 원정군은 광저우를 포기하고 북상해 베이징의 관문 톈진(天津)을 공격했다. 영국군의 톈진 상륙에 놀란 황제는 전쟁의 원인 제공과 책임을 물어 임칙서를 파직했다. 전쟁은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1842년 8월에 맺은 난징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해 온 중국은 반식민지 국가로 몰락했다. 제국주의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됐지만 굴기(起)를 선언한 중국은 중화주의 부활을 소리 높여 부르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