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흔 “도전하기로 했으면 무조건 그것만 파고들어야”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1.25 16:51
  • 호수 1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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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생생토크] 연수 1년 만에 메이저리그 정식 코치 계약 맺은 홍성흔

 

지난해 9월말께 미국 애리조나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인턴 코치로 활약 중인 홍성흔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인스트럭셔널 리그(instructional league·30개 팀의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애리조나와 플로리다에서 비시즌 동안 열리는 야구 리그)가 한창인 가운데 40도가 넘는 열기 속에서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로 나이 어린 선수들을 상대하며 분주히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몹시 생경했고 신기했다.

 

홍성흔이 누구인가. KBO리그 신인왕과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2회(2001·2004년) 수상,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4년 연속(2008~11년) 수상했던 한국 최고의 타자 출신이다. 프로 통산 성적은 타율 0.301, 208홈런, 1120타점, 872득점. 그런 그가 야구장 안팎을 뛰어다니며 공을 줍고 수비 훈련을 시키는 등 어린 선수들과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이뤄나가는 장면들은 신선한 감동을 안겨줬다.

 

2016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했던 홍성흔. 2017년 2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루키팀 인턴 코치로 지도자 연수를 시작했던 그가 올 시즌부터는 샌디에이고 정식 코치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선다. 한국 야구인 중 메이저리그 정식 코치 계약을 맺은 이는 홍성흔이 첫 사례. 언제 봐도 반갑고 건강한 웃음을 선사하는 홍성흔과의 인터뷰를 정리한다.

 

홍성흔 메이저리그 코치 © 시사저널 임준선

 

3개월 전에 귀국한 걸로 알고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지인들 만나고 행사에도 참석하고 방송도 하는 등 정말 바쁘게 보냈다. 3개월이 후딱 지나간 것 같다.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영어 공부는 놓지 않았다.”

 

 

영어학원에 다니는 걸로 아는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2시간씩 수업을 받는다. 아내도 함께 영어학원에 다닌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워 하다가 지금은 아내가 학원 수업을 더 기다린다. 나하고 반은 다르지만 수강생들, 강사와 많이 친해진 듯하다.”

 

 

상상만 해도 재미있다. 부부가 함께 영어학원에 다니는 모습이.

 

“미국에서 생활하며 영어에 대한 갈증이 굉장히 심했다. 내가 생각하는 내용을 정확한 문장과 단어로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어렵다 보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현지에서도 저녁마다 영어학원에 다녔지만 수준이 너무 높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학원에 등록한 것이다.”

 

 

은퇴 후 방송국 측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안정환, 서장훈 등 스포츠인 출신의 방송활동이 활발한 터라 관심이 갔을 것 같다.

 

“물론 이런저런 프로그램 제안을 받았을 때는 한 번쯤 생각해 봤지만 방송은 나보다 말솜씨 좋고 얼굴 잘생기고 위트 있는 분들이 해야 한다. 야구는 내가 오랫동안 해 왔던 일이고 야구장에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야구라면 야구장에 남는 게 당연했다. 방송은 잠깐의 예능 출연은 가능하지만 그걸 본업으로 삼고 싶진 않았다.”

 

 

지난해 4월30일 홍성흔이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두산과 롯데 경기에 앞서 열린 은퇴식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홍성흔은 2016년 11월22일 두산 베어스를 통해 18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감한다고 발표했다. 현역 연장을 하고 싶었지만 두산은 더 이상 홍성흔과 계약할 의지가 없었다. 타 구단으로의 이적 기회를 찾는 대신 홍성흔은 명예로운 은퇴를 선택했다. 당시 홍성흔은 두산의 공식 발표 외에 개별 인터뷰를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 조용히 미국으로 떠났다.

 

 

은퇴 발표 후 기자들과의 접촉을 피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은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구단과 미팅 후 은퇴 결심을 굳힌 다음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미국에서 코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봤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황이라 마음만 급했다. (박)찬호 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박찬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인턴 코치 자리를 소개해 준 건가.

 

“찬호 형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고문을 맡고 있다. 내가 진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찬호 형이 내게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찬호 형은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선수로 뛰고 싶어 했다는 걸 잘 알고 계셨다. 선수로선 인연을 맺지 못한 곳인데 지도자로 도전해 보라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자리를 알아봐주셨다. 찬호 형이 처음에 제시한 조건이 있었다. 한두 달 하고 때려치우려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고. 난 3년 보고 왔다. 3년 동안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1년 만에 정식 코치로 임명된 것이다.”

 

 

인턴 코치가 정식 코치가 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들었다.

 

“찬호 형도 (정식 코치가 되려면) 2년이나 3년이 걸릴 수도 있고, 그 전에 해고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나도 각오를 한 터라 1년 동안 열심히 해 보고 잘리면 다른 팀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구단이 내게 정식 코치를 제안해 줬다. 처음엔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날 여기로 이끌어준 찬호 형도 굉장히 기뻐하셨다. 나와 같은 케이스가 드물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 영어의 기초지식 없이 감탄사, 추임새만 배우고 미국으로 건너간 홍성흔은 자신이 한국에서 누렸던 모든 걸 내려놓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동료 코치들이 건네는 농담, 짓궂은 장난도 자신을 좋아해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받아들였다.

 

 

인턴 코치는 혼자였나.

 

“아니다. 일본·대만인 인턴 코치도 있었는데 조용히 정리됐다. 그들도 나처럼 다음 시즌에도 이 팀에 남고 싶어 했지만 재계약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그들과 헤어지는 게 안타까웠고, 약간은 뿌듯했다. 3명의 동양인 인턴 코치 중에서 나 혼자 남았고, 정식 코치로 계약을 맺게 된 게 자랑스러웠다(웃음).”

 

 

샌디에이고 구단이 코치 홍성흔의 어떤 부분에 매료된 것인가.

 

“매사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게 구단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바닥에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에 뭘 해도 즐겁게 했다.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공을 나르고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솔직히 전날 들었던 내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다음 날 새벽에 출근해서 게시판에 붙어 있는 훈련 스케줄 표를 번역기 돌려 해석한 다음 훈련을 세팅해 놓은 부분도 있다. 200여 명의 선수들, 스태프들 이름을 전부 외웠다. 물론 쉽지 않았다. 이름과 얼굴이 연결되지 않아 이름 옆에다 신체 특징, 헤어스타일, 체형 등을 따로 적어 두기도 했다.”

 

 

술값이 많이 나갔다고 하던데 무슨 얘기인가.

 

“훈련 마치면 코치들이 주로 바에 모여 대화를 나눈다. 나한테도 참석 여부를 물었는데 친해지고 싶어서 거절하지 않고 모든 자리에 참석했다. 미국은 더치페이 문화지만 술값을 모두 내가 계산했다. 한국에선 형이 내는 거라면서. 그들도 사람인지라 술값 내주니까 정말 좋아하더라. 그렇게 친해졌다. 맥주 한두 잔씩 마시며 야구 얘기, 선수들 얘기를 하면서 말이다. 영어도 술자리에서 많이 늘었다. 내가 쓰기는 안 돼도 듣기와 말하기는 좀 되는 편이다.”

 

 

그곳의 코치들은 홍성흔이 선수 시절 어떤 커리어를 갖고 있었는지 알고 있나.

 

“한 코치가 유튜브를 통해 내 이름을 검색해 본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 배트플립(타격 후 배트를 던지는 행위) 영상이 화제를 모았다. 메이저리그에선 배트플립 자체를 금기시하는 문화라 그들 눈에는 배트플립 자체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서 영상을 보며 ‘오 마이 갓’이란 탄식이 쏟아져 나오더라. 한번은 내가 한국에서 샴푸 광고모델로 출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클럽하우스 매니저가 내게 먼저 양해를 구한 다음 내 사진을 프린트해 샤워실에 비치해 놓은 샴푸통에 모두 붙여놨다. 선수들이 샤워할 때마다 그 샴푸통을 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스태프들이 모두 날 좋아해 줬다. 영어로 인해 스트레스는 많이 받았지만 생활은 재미있었다. 코치들은 내가 엄청난 부자인 줄 안다. 그렇지 않고선 돈 한 푼 받지 않고 야구를 배우겠다며 인턴 코치를 자처한 내 상황을 이해 못한다. 그들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구단의 지원이 전혀 없었나. 월급은 차치하고 숙식비는 제공받는 것 아닌가.

 

“전혀 없었다. 단 한 푼도 안 받았고 모두 개인 비용으로 해결했다. 한두 차례는 카드 한도가 초과돼 결제가 안 된 적도 있었다. 아내한테 가장 미안했다. 은퇴 후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줄 거라 믿었던 남편이 은퇴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나버렸으니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나. 그 미안함 때문에 더 열심히 생활했다. 아내도 혼자 두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하는데 나도 여기서 인정받고 올라서야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홍성흔은 힘들 때마다 자신이 왜 미국에서 고생하고 있는지를 떠올렸다고 말한다.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지 못하는 미안함이 컸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동영상으로 영어 공부를 했고 읽기, 쓰기 등을 보충하는 시간을 가졌다. 생존을 위한 영어 공부였다.

 

 

지난해 9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인턴 코치로 활약 중인 홍성흔 © 사진=이영미 제공

 

마이너리그 유망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느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 같다.

 

“선수 때의 난 강한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강하게 던지고, 강하게 치고…. 그런 강함 속에 부드러움이 있어야 한다는 걸 여기서 배웠다. 만약 내가 어린 나이에 그 부드러움을 배웠더라면 좀 더 오랫동안 포수 마스크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야구의 기본기는 다 똑같다. 그러나 이곳에는 수백 가지의 훈련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서 선수한테 맞는 프로그램을 빼내 적용한다. 미국 야구를 접하면서 새삼 깨달은 게 있다.”

 

 

어떤 부분을 깨달았다는 건가.

 

“메이저리그로 올라가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된 것이다. 프로와 계약한 선수가 루키리그부터 시작해 빅리그까지 올라가려면 7, 8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단계를 거치며 수많은 선수들이 탈락의 쓴맛을 본다. 빅리그까지 도달하는 선수는 그들 중 1%밖에 안 된다고 들었다. 찬호 형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추신수가 얼마나 큰 선수인지, 그리고 한 시즌을 뛰고 한국으로 돌아간 황재균을 비롯해 박병호, 김현수 등 모두가 엄청난 일을 해냈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는 메이저리그가 이토록 닿기 힘든 곳인지 잘 몰랐다. 여기서 선수들과 함께 뛰고 부대끼면서, 또 트레버 호프만, 노모 히데오 등 레전드급 코치들과 함께 미팅하고 야구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메이저리그 세계의 위대함을 배우고 느꼈다.”

 

 

만약 샌디에이고 구단에서 정식 코치 제안을 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계획이었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무조건 3년은 버티려 했기 때문에 다른 팀 인턴 코치 자리를 알아봤을 것이다. 그 정도 각오는 항상 갖고 있었다.”

 

 

정식 코치로 맞이하는 올 시즌은 각오 자체가 남다를 것 같다.

 

“지난 시즌은 홍성흔이 어떤 인물이라는 걸 보여준 시기였다. 올 시즌에는 구단의 선택이, 구단이 내게 준 기회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래서 이토록 영어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중이다. 선수들을 지도하려면 정확한 어휘 구사가 필수다. 선수들에게 야구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게 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하고, 그것만이 롱런의 길이다. 내 성격이, 중간이 없다. 도전하기로 했으면 무조건 그것만 파고들어야 한다. 미국에서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도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감독을 의미한 건가.

 

“그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찬호 형이 말하길 메이저리그 감독, 코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더라. 미국 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곳이 굉장히 냉정한 곳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 입에 물고 있다가 다 녹거나 약간의 쓴맛이 나면 그냥 뱉어버린다. 한국은 정이란 게 있지 않나. 여긴 무조건 해야만 한다. 봐주는 일이 없다. 잘해야만 살아남는 곳이다. 나의 최종 목표는 마이너리그 감독이다. 정식 코치에 안주하기 싫어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일단 목표를 정했고, 그 목표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홍성흔은 곧 취업비자를 발급받고 미국으로 향할 예정이다. 구단으로부터 월급은 물론 호텔비, 식비, 4대 보험 혜택도 제공받는다. 선수 때 이루지 못한 미국 야구의 꿈을 마흔세 살의 나이에 지도자로 경험하고 있는 홍성흔. 그의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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