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은 茶를 바다에 던진 데서부터 비롯됐다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1.26 08:58
  • 호수 1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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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Tea Road] 반달리즘 ‘보스턴 차 사건’으로 탄생하게 된 미합중국

 

찻잔 속의 차는 정적(靜的)이지만, 찻잔 너머 차는 나라의 운명을 가를 정도로 역동적이다. 1773년 12월16일 저녁 7시,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 멤버 84명은 아메리카 원주민 모호크족으로 위장하고 보스턴 항구로 향했다. 70여 명의 시민이 합세해 그리핀(Griffin) 부두에 정박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3척을 습격했다. “배에 선적된 차(茶)는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지만, 배는 파손하지 않기”로 선장을 설득해 창고 열쇠를 인수한 이들은 3시간 동안 324상자, 42톤에 달하는 차를 바다에 쏟아버렸다. 이날 벌어진 ‘차 파괴 사건(Destruction of the Tea)’을 영국인은 물론 대영제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지식인들조차 ‘비열하고 용서할 가치도 없는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개탄했다. 미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차 파괴 사건’에 동참한 사람들을 “북미 대륙의 수치”라고 비난했다. 미국독립혁명의 단초가 된 ‘보스턴 차 파괴 사건’은 1830년대에 와서야 ‘보스턴 티파티(Boston Tea Party)’라는 우아한 이름을 갖게 됐다.

 

필자는 지난해 12월16일 보스턴을 방문했다. 그러나 ‘차 파괴 사건’이 발생한 그리핀 부두는 매립지로 변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옛 그리핀 부두 동쪽 152m 지점에 세워진 기념박물관(Boston Tea Party Ships and Museum)을 찾아갔다. 중국 광둥(廣東)성 후먼(虎門)에 있는 아편전쟁박물관과 비교하면 규모는 소박했지만, 전시 내용과 체험 프로그램이 알찼다. 붉은 페인트로 칠한 아담한 2층 건물과 ‘차 파괴 사건’ 당시 피습당한 3척 중 다트머스(Dartmouth)를 제외한 2척의 브리그(brig·쌍돛대 범선)인 ‘비버(Beaver)호’와 ‘엘리노어(Eleanor)호’가 완벽하게 복원돼 운영되고 있었다. 차와 연관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공통점이 있지만, 패배한 전쟁을 기념하는 무거운 분위기의 아편전쟁박물관과 달리, 독립혁명의 기폭제가 된 ‘보스턴 티파티’ 기념박물관은 흥겨운 이벤트 홀에 온 느낌이었다.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티파티 박물관’ © 사진=서영수 제공

1773년 바다에 던져진 것 중 유일하게 건져진 차 상자 © 사진=서영수 제공

 

‘티파티 박물관’ 흥겨운 이벤트 홀 느낌

 

기념박물관에는 바다에 내던져진 차 상자 324개 가운데 존 로빈슨(John Robinson)이 건져내 유일하게 살아남은 차 상자가 전시돼 있었다. 기념박물관 직원과 입장객이 역할을 분담해 참여하는 상황극은 일방적인 설명과 안내보다 훨씬 감흥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내용이 바뀌는 홀로그램 3D체험관에서는 ‘보스턴 티파티’ 다음 날 아침에 벌어지는 갑론을박이 재연되고 있었다. 주제는 ‘당신이라면 애국자답게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에 충성할 것인가?’를 되묻고 있었다.

 

파노라마 화면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미니트맨극장에서는 독립전쟁 최초의 렉싱턴(Lexington) 전투 장면을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와 액션 팩(Action-packed)으로 보여주는 《렛 잇 비긴 히어(Let it Begin Here)》가 상영되고 있었다. 잘 훈련된 영국 정예군과 맞서는 아메리카 식민지 민병대(militiamen·소집하면 1분 만에 모인다는 민간의용군)의 대결은 미국인에게 비장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복원된 무역선 선실 내부를 둘러보고 배 위에서 차 상자를 바다에 내던지는 체험도 할 수 있었다.

 

기념품 매장에서 ‘보스턴 티파티’가 어떻게 미국독립혁명의 불꽃이 되었는지에 대해 할로우 길스 웅거(Harlow Giles Unger)가 저술한 《아메리칸 템페스트(American Tempest)》를 한 권 샀다. 기념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애비게일 티 룸(Abigail’s Tea Room & Terrace)은 18세기 양식으로 꾸며진 전망 좋은 카페다. 결혼식 같은 개인 행사장으로도 사용되는 애비게일 티 룸에는 ‘차 파괴 사건’ 날 밤바다로 내던져진 중국차 5종류와 같은 차를 골고루 시음할 수 있는 메뉴가 있었다. 티 룸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방금 구입한 책을 펼쳐봤다. ‘보스턴 학살’에 대한 글이 첫눈에 들어왔다.

 

‘보스턴 학살’은 우발적 사건이었다. 1770년 3월5일 보스턴에 주둔한 영국군 장교에게 밀린 비용을 받으러 온 가발업자가 술에 취해 “돈을 당장 달라”고 항의하며 “총을 쏘려면 쏴보라”고 놀리며 장교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옆에 있던 영국군 병사가 모욕적인 언행을 제지하려고 가발업자를 구타했다. 비명을 듣고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부두 노동자와 시민들이 모여들어 얼음덩이와 돌을 집어던졌다. 얼음덩이에 머리를 맞아 병사가 쓰러지면서 당황한 영국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5명이 죽고 6명이 부상당한 이 사건은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가 ‘대학살’로 규정하고 정치이슈로 만들었다. 분노한 시민을 대표한 새뮤얼 애덤스는 보스턴 중심부에 주둔하던 영국군 철수를 요구해 관철시켰다. 영국군을 캐슬 아일랜드 요새로 이동시킨 영국은 차에 부과하는 세금을 제외한 다른 직접세를 폐지했다.

 

8년에 걸친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프랑스와 유럽에서 벌인 ‘포메라니아 전쟁’ 후유증으로 영국 국가재정은 바닥이 나고 국고를 채워주던 동인도회사도 과도한 차 수입으로 파산 직전이었다. 신대륙 식민지 13개 주에 전쟁 경비 부담을 요구했지만, 재정지원을 회피했다. 직접통치 전초전으로 영국 의회는 1764년 설탕조례를 시작으로 직접세를 아메리카 식민지에 부과했다. 1765년에는 악명 높은 인지세를 통과시켰다. 식민지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압력과 차를 비롯한 모든 거래 품목에 직접세를 높이고 세금징수에 필요한 비용도 부담시키는 타운센드 법안(Townshend Acts)을 시행했다. 자치권을 침해당했다고 여긴 아메리카 식민지 지식인들은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보스턴 티파티’를 묘사한 삽화(위)와 티파티 재연 모습 © 사진=서영수 제공

 

영국의 분노에 미국은 독립 추진

 

상황은 우발적이었지만 시대적 필연이었던 ‘보스턴 학살’ 사건을 겪은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는 중국산 차 문제로 갈등이 심화됐다.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차를 수출했지만, 신대륙 차 상인이 밀수한 차에 밀려 판매가 부진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창고마다 차가 가득 쌓이며 일부는 썩기도 했다. 영국 동인도회사와 대주주인 영국 정치가들은 파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하는 차에만 관세를 특별히 면제해 주는 차조례(Tea Act)를 전격 시행했다.

 

밀거래되는 차보다 소비자가격이 낮아지면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재고로 넘쳐 썩어가던 차를 무관세로 수출했다. 반값에 차를 마실 수 있게 된 신대륙 소비자도 이 정책을 환영했다. 네덜란드와 차 밀거래를 해 오던 존 핸콕(John Hancock) 같은 상인들은 타격이 컸다. 영국에 반대해 온 사회운동가 새뮤얼 애덤스와 과격한 행동에 능숙한 밀수업자 존 핸콕이 주도한 ‘차 파괴 사건’에 분노한 영국은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시키고 보스턴 항구를 봉쇄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차 값을 변상하러 런던에 갔지만, 영국 의회는 면담도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 독립의 타당성’을 새삼 인식한 아메리카 식민지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을 1776년 7월4일 발표하며 독립혁명을 선포했다. 1783년 9월3일 독립국가로 인정받은 미합중국 탄생은 보스턴에서 차를 바다에 버린 반달리즘이 발화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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