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한랭 기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웠다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1 16: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 중근세 동아시아의 기후변화와 역사 아웃라인

 

고려는 ‘코리아’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릴 정도로 해상활동이 활발했던 국가이다. 거의 정확히 중세 온난기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존재했던 만큼, 신라에 비교해볼 때 바다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기세가 등등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북으로는 요와 여진, 서로는 중국의 송나라, 남동으로는 일본 규슈 지방, 남으로는 타이·베트남·​아라비아까지 커버하는 교역 규모를 갖고 있었다.

 

고려의 대외무역도 (참고자료: 정수일 교수) © 시사저널 디지털뉴스팀


 

하지만 이전 4국시대의 가야에 비할 바는 못 됐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역사학이라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지 모르겠다. ‘일단 정치적으로 중국에 눌려 있었고, 일본 역시 각 지방별로 무신들이 실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해상활동이 경제적 교류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중앙정부 자체가 끊임없는 정변으로 실질적으로 자기 국민들의 활동을 밀어줄 수 없었다는 요인도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도 몇 번 나왔지만 이런 식의 설명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가장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게 자연의 이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느 때는 집단으로 일치단결해서 눈부신 위업을 보이고, 또 어느 시기엔 서로 반목하며 멸망을 자초한다. 왜 그런 행동방식의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고려, 온도 높고 기간도 길었던 중세 온난기에 번성

 

고려는 그 이전 4국시대의 활동기였던 로마 기후 최적기보다 더 온도도 높고 기간도 길었던 중세 온난기에 존재했던 사회다. 한반도처럼 해양활동에 최적인 입지로 보아 당연히 아주 활발한 해양활동을 기반으로 풍요롭게 당당하게 살았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고려는 거란족에게 시달리고 북방 이민족 출신 원나라에 붙들려, 그리 살기 좋았던 시대를 형성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우리는 그 이유 중 중요한 부분을 안다. 백두산 폭발로 인한 타격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가 그렇게 헤매고 있는 동안 백두산 폭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던 중국은 잘 살았을까? 676년 신라와 손을 잡고 한반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확보한 당나라는 약 200년 동안 중원의 주인으로, 또 동아시아의 주역으로 자리를 어느 정도 지켰던 것 같다. 하지만 800년대 말에 가까워지면서 중국도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문자가 남아 있어서 ‘역사시대’라고 부르는 지난 5000년 간, 지구상 어느 지역이나 대체로 그랬지만 중국도 끊임없는 투쟁과 세력교체로 이어진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혼란이 심했던 시기로서 꼽히는 것이 당 말기에서 오대십국과 북송을 거쳐 남송에 이르는 때다. 

 

오대십국이란, 907년 당(唐)이 멸망한 이후 황하 유역에 들어섰던 5개의 왕조와 주변부의 10개 이상의 나라를 말한다. 이 시기의 정치사는 끊임없는 배신과 하극상으로 점철되었으며, 세운지 1년도 안 되어 무너진 나라의 수도 적지 않다. 백성들은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에, 권세가들의 싸움에 병사로 동원되는 이중고로 정말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979년 송나라가 중국을 대체로 통일했지만, 안팎으로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결국 1127년 여진족의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송왕조의 주류는 강남으로 쫓겨가 남송을 세운다. 거기서도 밖으로는 여진족 때문에 무지 고생하고 안으로는 백성의 반란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몽골군의 원나라가 침입하여, 1279년 남송시대도 끝나게 된다.

 

왜 하필 이 시기에 그렇게 사회가 혼란했을까? 기후변화 그래프만 보면 온난기로 먹고 살 것이 풍족해졌을 것 같다. 하지만 당나라 말기부터 기후가 급격히 온난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흉작이 계속되어 민중 봉기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당이 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앞서 본 유럽의 경우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었다. 중세 온난기에는 지중해 남부 몇 개 교역항구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먹고 살기 힘들었으며 분쟁이 많았던 시기였다. 심지어 종교를 앞세우고 지리멸렬하게 싸웠던 십자군 전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왜 중세온난기는 그 이전 온난기인 로마시대 기후최적기보다 더 따뜻한 시기가 더 길게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사람들을 힘들게 했을까? 역사에서 풀리지 않은 의문이 생길 때는 지구 위로 올라가보자. 이 현상은 이 시기에 강력하게 작용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거시 요인인 지구자기장 상태까지 통합해서 분석해야 설명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지구자기장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은 이 글에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21세기의 전략을 생각한다는 이 글의 흐름을 위해 필요한 부분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려 한다.)

 

마침 이 시기에는 좋은 자료가 있다. 중국에서는 (아마 그보다 앞선 해양족이었던 가야인의 유산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해양활동의 산물로, ‘자석’에 대한 지식이 앞서 있어서, 환경요인 중 하나로서 자기장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다음에서 그런 기록을 토대로 만든 그래프와 이 시기의 기후변화를 보여주는 그래프를 함께 볼 수 있다.

 

중세시대 기후변화와 화산폭발 (왼쪽) 및 중국 자기장 변화 역사 (오른쪽). Cliff Harris&Randy Mann, ‘Global Temperature Trends From 2500 B.C. To 2040 A.D.’ 게재 그래프와 Peter J. Smith&Joseph Needham ‘Magnetic Declination in Medieval China 게재 그래프로부터 재구성

 

기후 급속히 떨어진 1200년대 후반, 중국 극심한 혼란기 맞아

 

오른쪽 지구자기장 변화 그래프를 보면, 약 900년에서 1200년까지, 즉 중세 온난기가 시작돼서 정점에 이르는 시기동안 지구자기장이 급속히 감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그래프는 중국 역사서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지구자기장 감소 현상은 광역적 규모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문화중심지였던 북송의 카이펑이나 남송의 항저우에서 한반도까지 거의 비슷한 정도의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지구자기장이 급격히 감소하면 일단 화산폭발 등 지각활동이 활발해진다. 600년대부터 시작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운봉기 백두산 폭발이 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엄청나게 대규모로 활성화된 것은 이런 요인이 작용해서였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시기엔 지구 시스템 자체가 요동치듯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동식물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다. 그 결과 개체 번식은 초기엔 반짝 왕성해지다가 곧 감소하며, 동물이건 식물이건 그리 크게 성장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큰 나무가 별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며, 장거리 항해가 힘들어진다. 로마시대 기후 최적보다 해상활동에 적합하지 못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식물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면 농업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온난기인데도 불구하고 흉작이 계속된다. 물론 사람에게 있어서도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진다. 식량이 줄어드는데다가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져 공격성이 강해지기 때문에, 이런 시기엔 앞 뒤 안 가리는 소모적 전투가 많았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한반도보다 더 그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한반도는 그래도 왕조는 어느 정도 유지했는데, 중국은 무수히 왕조가 엇갈리는 혼란기를 겪게 된다. 그러다가 1200년대 후반에는 기후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이럴 때는 바다에 면해 있거나 위도가 낮은 지방보다 내륙에 있고 위도가 높은 지방일수록 식량생산성이 빨리 줄어든다. 위도가 높은 내륙지방에서 온난기 동안 어느 정도 세력을 굳혔던 몽골과 같은 민족이 공격적으로 남침하기 시작한 것은 이런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몽골족의 원나라는 한때 무서운 속도로 유라시아대륙을 휩쓸었지만, 원래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으며, 본토가 위도가 높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한랭기가 되면 세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한랭기로 진입하는 1300년대 중반, 중국의 새로운 주인으로 좀 더 남쪽인 중원의 한족(漢族) 출신 명나라가 들어선다.

 

고려에서는 기후가 급격히 한랭해지면서, 온난기 동안 해상활동으로 부(富)를 축적했던 상인들의 정치자금으로 성장한 개경의 정치 세력이 역시 급속도로 약해졌다. 명의 건국과 거의 동시에 한반도에서도 함경도 내륙지방을 근거로 세력을 쌓아왔던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다. 

 

조선은 폐쇄적이고 방어적으로, 그리고 상당히 효율적으로 나라를 지켜갔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 시기는 중·근세사를 통틀어 전(全)지구적으로 가장 살기 힘들었다던 소빙하기다. 중국에서도 명과 청으로 왕조가 갈렸고, 일본도 막부 체계로 칼바람 피바람이 휘몰아치던 시기였다. 세계의 다른 곳도 대동소이했다. 

 

그 와중에 조선은 참 진득하게 그 힘든 500년 동안 동일 왕조의 질서를 유지해낸 편이다. 다만 육지를 중심으로 성장한 세력이 주축이었던 조선이 소빙하기를 맞아 한반도의 주인이 되어 있는 동안, 한반도의 해상활동은 거의 제로 상태에 가깝게 축소되고 잊혀져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