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협 출신' 신상수씨 “공동체 가치, 웨딩 분야서 펼치고파”
  • 이민우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5 13:51
  • 호수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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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대협 간부에서 웨딩업계 대표주자로 성장한 신상수 스칼라티움 대표

 

“대붕처럼 큰 꿈을 품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파묻히지 않겠다.” 웨딩업계의 대표주자인 스칼라티움의 신상수 대표(51)가 자신의 저서에 서문(序文) 제목으로 뽑은 말이다. 87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가 상당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던 그였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는 여전히 가슴 한편에서 작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대학 시절 추구했던 가치는 어떻게 그의 삶을 지배했을까.

 

신 대표는 1968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진 못했지만 아름다운 섬진강 물줄기에서 ‘함께 행복한 삶’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1987년 한양대에 입학했을 무렵, 전두환 대통령은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그때 그 시절,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거리에서 살았다. 6·10 항쟁 이후 치러진 직선제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활동을 이어갔다. 학내 동아리연합회장을 맡아 수원지역대학생협의회 간부로 활동했다. 1991년 대학을 졸업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을 무렵, 같이 활동했던 전대협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그 당시 평범했던 대학생의 ‘업보’였다.

 

신상수 스칼라티움 대표 © 시사저널 최준필

 

“분노할 수 있는 용기, 부끄럽지 않다”

 

그가 군에서 제대하자 세상이 변해 있었다. 군사독재는 끝났고 문민(文民)정부가 출범한 상태였다.  함께 활동했던 ‘동지(同志)’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정치권이나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신 대표도 건강한 사회인의 길을 선택한 뒤 자신의 뜻을 지켜가겠다고 다짐했다.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취업이 어려워 포장마차를 하기도 했다. 요리를 배우다가 같이 활동했던 선배의 조언으로 보험영업을 시작했다. 우연히 시작한 보험업에서 그는 친화력으로 연도대상을 받는 우수사원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입시켰던 고객 10명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자 보험 일을 그만뒀다.

 

평범한 사회인으로서 돈을 벌면서도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웨딩사업에 뛰어들었다. 웨딩드레스를 소개하는 일로 시작해 예식장 운영에 뛰어들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결혼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자 애썼다. 돈이 없어도 서러운 결혼식을 하는 일은 없게 하리라는 목표도 세웠다. ‘스칼라티움’이라는 브랜드 속엔 ‘결혼이란 인생의 계단’이라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덕분에 그의 회사 또한 연매출 수백억원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5만여 쌍이 그의 웨딩홀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 대표는 대학에서 추구했던 가치를 여전히 지켜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똑같이 활동했을 거예요. ‘분노할 수 있는 용기’는 부끄럽지 않으니까요. 대학에서 추구했던 가치를 현실의 삶 속에서 녹여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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