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로용지 발송으로 '납부 의무' 혼동 유도하는 적십자회비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7 10:14
  • 호수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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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통한 회비 모금은 기부금품법 위반”…지로 용지 발송 위한 개인정보 제공도 문제로 지적

 

대한적십자사(적십자)의 1차 집중모금기간이 1월31일로 종료되면서 해묵은 적십자회비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반강제 징수’ 논란이 있는 적십자의 모금 방식부터, 모금된 돈을 원래 목적과 다른 곳에 사용하거나 늑장 집행하는 적십자의 행태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공무원들이 적십자회비 모금 행위에 나서도록 압박을 받았다는 주장까지 최근 제기됐다. 관행처럼 굳어진 적십자의 구시대적인 모금 방식과 방만한 운영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시민단체 “반강제성 지로 납부제 폐지해야”

 

적십자는 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25~75세의 모든 세대주에게 지로 용지를 발송해 적십자회비를 납부받고 있다. 적십자회비 지로 용지가 일반 공과금 지로 용지와 비슷하고, 주소와 세대주 이름이 정확하게 적혀 있어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한다고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지로 용지에는 납부기간도 명시돼 있다. 연체금을 우려해 서둘러 회비를 납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미납한 세대주에게는 지로 용지가 2월에 재발송되기까지 한다. 지로 용지에 ‘적십자회비는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국민성금’이라는 문구가 기재돼 있지만, 의무 납부가 아니라는 충분한 설명이 없어 헷갈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적십자가 지로 용지를 발송해 모금한 2016년 회비는 약 332억원이다. 적십자 전체 기부금의 32.42%를 차지하고 있다. 적십자는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을 근거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세대주 성명과 주소 등 개인정보뿐 아니라, 회비를 납부한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도 요청할 수 있다. 개인정보를 제공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대한적십자사는 연말연시 모든 세대주에게 지로 용지를 발송하고 있다. 적십자회비 납부는 자율사항이지만, 고지서 형태로 발송되는 점 때문에 의무사항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 시사저널 이종현

 

최근 개인정보 보호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본인 동의 없이 개인정보가 제공되는 지로 용지에 대한 불쾌감도 커지고 있다. 공공기관으로부터 개인정보를 제공받아 지로 용지를 보내는 방식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는 지난해 초 성명을 내고 적십자의 반강제적 회비모금 방식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대구참여연대와 우리복지연합 등이 참여하는 연대회의는 당시 “적십자의 특혜모금 방식에 대해 강력히 항의한다. 행정기관에 개인정보 요구를 중지하고 반강제성 지로 납부제를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적십자회비 모금은 1953년 한국전쟁 고아와 전상자들의 구호를 위해 정부가 국민들에게 성원을 당부하는 선포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국가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적십자 모금에 국가가 개입했을 수 있었다. 실제 적십자 활동은 많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적십자는 60년 이상이 지난 현재까지도 과거와 같은 낡은 방식 그대로 국가행정기관의 손을 빌려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이 아닌 지로 납부제 모금 방식은 앞으로 계속 저항을 받을 것이고, 모금액 역시 줄어들 것이라고 연대회의 측은 지적했다.

 

적십자회비라는 명칭이 강제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회비’라고 기부금을 지칭하는 것은 자발적 성금의 성격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연대회의는 “회비는 모임의 개설이나 유지를 위해 회원이 내는 돈이다. 적십자는 회원도 아닌 전 국민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반강제적인 지로 용지를 배포하고 있다”며 “회비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성금’ 등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십자회비는 1996년까지 통·반장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수납해 사실상 세금인 것처럼 모금됐다. 이 부분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자 지금의 지로 용지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도 통장이나 반장, 공무원들이 각 세대나 법인을 찾아 회비 모금을 하고 있다.

 

지로 용지도 공과금 고지서와 유사하게 납부기한을 명시한 형태인 데다, 통·반장이나 공무원들이 납부를 독촉하기 때문에 준조세(세금은 아니지만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하는 부담금)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최근 적십자회비 고지서를 받았다는 한 직장인은 “납부 실적이 저조하다면 투명한 경영과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낼 수 있도록 해야지, 무조건 내라는 식으로 고지서만 발부하면 되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우리복지시민연합에 따르면, 전 세계 198개국 적십자 중 세금 같은 지로 용지를 세대주·사업자·법인에 발송하는 방식으로 모금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일본은 적십자 지사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하거나, 적십자 관계자의 가정방문을 통해 회원가입을 신청한 경우에만 회비를 납부하고 있다. 미국은 공동모금단체(United way)나 홈페이지를 통해 모금하고 있다. 프랑스·독일 역시 적십자 회원에 한해서만 회비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적십자 측은 “여러 문제점을 고려하여 1996년 제도개선위원회를 거쳐 지로제도가 선택됐고 2000년부터 현행의 지로 용지 배부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라며 “지로 용지상에 ‘적십자회비는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국민성금입니다’라고 안내하고 있으며 2018년 2월 중 시행할 2차 모금부터 그 문구를 확실히 인지할 수 있도록 글자 크기를 확대해 정면에 노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비 모금 독려 과정에서 압력 가해져”

 

적십자의 각 지사가 지역별 모금 비율을 지자체에 고지하고 회비 모금을 독려하는 과정에서, 일선 공무원들에게까지 압력이 가해졌다는 주장도 최근 나왔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대구경북지역본부는 1월22일 “공무원을 동원한 불법적인 적십자회비 모금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대구시 측이 공무원들에게 적십자회비를 솔선 납부하고, 통장과 반장 등을 통해 아파트에 모금 협조문을 부착하고 구내방송을 실시하는 등 미납 세대에 대해 납부를 독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적십자회비 시·도별 모금실적 현황을 첨부해 납부실적이 저조한 구와 군에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기부금품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및 그 소속 기관과 공무원은 기부금품을 모집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엄연한 불법 모금인 것이다”고 강조했다.

 

관행적으로 이뤄진 공무원들의 적십자회비 모금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에도 공무원노조 충북본부가 “공무원을 동원해 적십자회비를 모금하는 건 기부금법 위반”이라며 적십자 충북지사장과 충북도지사에 대한 고소장을 접수했고, 2014년에는 제주지역본부가 “관권이 개입된 적십자회비 징수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적십자회비 모금 방식을 자율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울산본부의 한 공무원은 “본연의 업무에 충실해야 할 공무원들이 매해 연말이 되면 적십자 고지서를 들고 사업장을 일일이 방문해 납부를 독려하는 ‘앵벌이’를 하고 있다. 자율로 이뤄져야 할 회비 납부가 공무원이나 이·통장들의 위계나 사정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적십자는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외면하고 있다”며 기고를 통해 비판하기도 했다.

 

공무원노조 관계자는 “모금은 자율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한데, 반강제 이웃돕기를 하고 있다. (적십자는) 실적이 떨어지는 지자체장들에게 이야기하고, 지자체는 공무원들을 압박한다”며 “기부금도 투명하게 쓰이지 않고 있는 데다, 인건비로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 모금을 하는 다른 방법이 있음에도 아직도 지로 용지를 세대별로 발송하는 것은 구시대적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메르스·태풍 차바 등 재난이 발생한 지역의 적십자 지사가 기부금을 늑장 집행하거나 대체물품 구입을 늦게 했다는 점이 2017년 보건복지부 감사를 통해 드러났다. © 사진=연합뉴스

 

 

 

국가 재난 사태에도 기부금 늑장 집행

 

적십자 모금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적십자의 방만한 운영과 내부 비리 때문이기도 하다. 적십자회비가 올바르게 쓰이는지 알 수 없는 데다, 지난해 적십자의 횡령 문제 등이 터지면서 적십자의 투명성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나온다. 

실제로 적십자는 200억원에 가까운 기부금을 늑장 집행했다가 보건복지부로부터 특별감사를 받았다.(시사저널 1448호 ‘200억대 기부금 늑장 집행했다가 경고 받은 적십자’ 기사 참조)

 

적십자는 이재민 구호사업 등을 기치로 내걸고 있지만, 막상 재해를 입은 지역 적십자의 기부금 집행률은 낮다는 점도 드러났다. 경주에서 진도 5.8의 지진이 발생했지만 적십자 경남지사의 기부금 집행은 당시 24.9%에 불과했다.

 

태풍 차바(CHABA)의 영향으로 큰 피해를 입은 울산광역시 일부는 행정자치부로부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지만, 이 지역을 사업 대상으로 하는 울산지사의 기부금 집행 실적은 사태 초기 38%에 그쳤다. 2015년 메르스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에도 열화상카메라 등 대체물품 구입이 늦게 이뤄졌다. 심지어 방호복은 감사가 진행된 2017년 4월까지도 구입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적십자 측은 “기부금 집행률 조사 시점이 10월말 기준이었고, 실제 연도말 집행율은 본사 80.3%, 전국 지사 합계 86.8%였다”며 “태풍 차바 성금은 당초 지진 안전체험차량을 제작할 계획이었으나 기부자 측과 재협의해 급식차량과 세탁차량으로 변경하여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구매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세청과 한국가이드스타에 따르면, 적십자가 2016년 구호 활동·사회봉사 등 목적사업에 사용한 돈은 전체 지출의 59.9%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적십자 측은 “수익사업 지출은 병원, 혈장분획센터, 수품센터 등의 사업비 지출로 공공의료 서비스나 혈액제제 공급 등을 포함한다. 세법상 분류기준을 그대로 적용하여 공시하다 보니 본래의 목적에 쓰이는 비중이 낮다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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