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 “30년 전엔 상상도 못했던 한국의 동계올림픽”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7 12:44
  • 호수 147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미의 생생토크] 평창동계올림픽 강릉선수촌 촌장 ‘한국 쇼트트랙 선구자’ 김기훈

 

동계올림픽 사상 최초의 금메달 신화를 쓴 ‘겨울 영웅’ 김기훈 교수(51·울산과학대). 쇼트트랙이 올림픽 공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19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에서 남자 1000m 개인전과 5000m 계주에서 사상 처음 금메달을 획득한 주인공이다. 5000m 계주에서 마지막 주자로 나선 그가 결승선을 통과하기 직전 ‘날 들이밀기’로 역전승을 거둔 장면은 여전히 짜릿한 전율을 안겨준다. 김기훈은 2년 후인 1994년 릴레함메르동계올림픽 남자 1000m에서 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올림픽 2연패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에는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으로 참여해 이정수의 금메달을 이끌었다. 한국 쇼트트랙의 선구자로 빙판 위에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힌 교수 김기훈을 울산과학대에서 만났다. 현재 김 교수는 평창동계올림픽 강릉선수촌 촌장을 맡고 있다.

 

혜성처럼 나타난 선수였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쇼트트랙이라는 종목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1988년 캘거리동계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등장했지만 별다른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런데 19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에서 김기훈이 2개의 금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 금메달은 내가 평생 안고 가는 자부심이다. 운동선수로 최선을 다했고, 금메달로 보답을 받았고, 대한민국을 위해 내가 작은 힘을 보탰다는 생각에 성취감도 느꼈다.”

김기훈 교수 © 사진=이영미 제공

 

김기훈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5000m와 1만m를 주 종목으로 하는 장거리형이었다. 

초·중·고 시절 전국체전이나 전국대회에 출전하면 금·은메달을 휩쓸다시피 했지만, 스케이트를 본격적으로 타기 전에는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스케이트와 인연을 맺은 건 건강 때문이었다. 하체를 튼튼히 하려고 아버지가 빙상장에 데리고 다니며 스케이트를 배우게 한 것이다. 아버지는 취미로 생각하셨지만 난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재미를 느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크게 화를 내시더라. 아버지는 공부하는 아들을 원했고 난 공부보다 빙판 위를 가르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 계속 버티는 날 앉혀놓고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공부는 실패해도 인생에 도움이 되지만 운동은 1등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네가 운동을 선택하면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 그 말씀이 가슴에 확 박혔다. 이후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스케이트를 탔던 것 같다.”

 

1992년 2월21일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우뚝 선 김기훈(가운데) © 사진=연합뉴스

 

아버지가 만든 스케이트화 은퇴할 때까지 신어

 

원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인 그가 쇼트트랙으로 종목을 변경하게 된 건 고교 2학년 말인 1984년이었다. 국가대표 쇼트트랙 선수를 뽑는 선발전이 공고됐는데 학교 빙상부 코치의 권유로 쇼트트랙 대표 선발전에 출전한 것이다.

 

“정말 우연히 나간 대회였다. 쇼트트랙 스케이트화가 없어 스피드스케이트화를 신고 달렸다. 긴장감 없이 나간 대회에서 덜컥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때부터 쇼트트랙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김기훈의 아버지는 씨름선수 출신이었다. 몸의 유연성이 뛰어나 체조도 겸했다고 한다. 그 영향 때문인지 김기훈은 여자선수들 못지않은 유연성을 자랑했다. 건설업을 했던 아버지는 기계 다루는 솜씨가 좋았는데 김기훈이 쇼트트랙을 시작하면서 스케이트화 문제로 고생하자 직접 스케이트화 제작에 나서기도 했다. 동양인의 신체조건에 적합한 인체공학적 쇼트트랙 신발을 직접 개발해 특허까지 받았다.

 

“쇼트트랙 스케이트는 날(블레이드)이 스케이트화의 중심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는 절반이 곡선으로 이뤄진 빙판 위를 달려야 하는 쇼트트랙의 특성 때문에 코너링 때 원심력을 최소화하고 몸의 균형을 잡아주기 위함이다. 처음에는 움직임이 없는 고정된 스케이트화를 신었다가 스케이트 날이 움직일 수 있는 부츠를 만들었고 그걸 특허 냈다. 아버지가 만든 스케이트화를 1985년부터 1998년 동계체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신었다. 스케이트화 하나로 13년 동안 보수·수리해서 탄 것이다. 밑바닥이 약해지면 그걸 긁어낸 후 경화제를 발라 신었다. 알베르빌에서 금메달을 따니까 이탈리아·미국 스케이트 제작회사에서 나를 위해 따로 스케이트화를 만들어줬는데 가볍긴 해도 코너링할 때 원래 신던 신발과는 달리 스피드를 내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스케이트화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 스케이트화는 소중히 보관 중이라고 한다. 지금은 체중이 늘어 신발에 발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선수용 스케이트화는 사이즈를 좀 더 작게 만든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속도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은퇴 후에는 골격이 커지고 살이 찌니까 부츠에 발이 안 들어가더라.”

김기훈 교수는 선수 시절 아버지가 직접 제작한 스케이트화를 은퇴할 때까지 13년 동안 보수·수리해서 신었다. © 사진=이영미 제공

 

뒤늦게 쇼트트랙의 재미에 푹 빠진 김기훈은 국가대표팀에 합류한 이후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오로지 운동하는 데만 집중했다.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들의 경기 장면 동영상을 구해 봤고, 그들의 기술을 몸에 익히려 연습을 반복했다. 일본의 가와이 도시노부, 이시하라 다쓰요시, 영국의 윌프레드 오렐리의 경기 영상은 김기훈에게 좋은 교재로 작용했다. 1988년 캘거리동계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출전한 쇼트트랙에서 김기훈은 1500m 금메달을 거머쥐었는데, 이 금메달은 김기훈에게 자신감을 선물한다.

 

“당시의 난 쇼트트랙을 하면서 금메달을 따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단,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 내 생활의 모든 부분을 쇼트트랙에 맞췄다. 잠을 잘 때도 그냥 잠들지 않았다. 코너링 자세로 다리를 꼬고 자다가 쥐가 나기도 했다. 스케이트화를 신고 무릎과 무릎 사이에 베개를 집어넣은 후 붕대를 감고 자기도 했다. 아버지가 함께 방법을 연구해 주셨다. 그런 노력들이 짧은 시간에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김기훈은 현역 시절, ‘외다리 주법’(코너에서 원심력을 극복하고 스피드를 이어가기 위해 한 발로 스케이트를 타는 기술)과 ‘호리병 주법’(직선 주로에서 인코스로 달리다가 다시 바깥쪽으로 빠지면서 상대를 앞서 나가는 기술)을 착안해 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직선 주로에서 바깥쪽으로 추월해 스케이팅을 한다. 김기훈은 직선 주로에서 안쪽으로 파고들다가 나오면서 다시 트랙을 끼고 도는, 당시 쇼트트랙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주법을 개발했다. 주로가 호리병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호리병 주법’이라고 불렸다. 이 기술은 혁신을 넘어 쇼트트랙의 정석으로 자리 잡았다. 김기훈이 이 기술을 착안한 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존재한다.

 

 

‘외다리 주법’과 ‘호리병 주법’ 그리고 ‘개구리 장갑’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롯데월드 빙상장을 자주 찾았다. 사람이 많은 주말에는 연습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간이 비좁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 틈새로 헤집고 다니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코너를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응용력이 생기더라. 미리 빠져나갔다가 막혀서 속도가 떨어지면 바짝 붙어서 스피드를 높였다. 공간 지각 능력과 속도 내는 법, 위치 선정 등을 연습하는 최고의 훈련 장소였다.”

 

외다리 주법의 탄생에도 다음과 같은 사연이 담겨 있었다. 

 

“유치원생들이 스케이트 타는 걸 보니까 코너링할 때 잘 안 되다 보니 한 발로 쭉 돌아가더라. 한 발로 도는 아이가 훨씬 빨랐다. 그걸 적용해서 코너링할 때 스피드를 줄이지 않고 한 발로 빠져나가는 법을 연구했다. 손에 장갑을 끼고 코너를 돌 때 중심을 오른발에 싣고서 왼발을 드는 주법이다. 그렇게 해서 ‘외다리 주법’이 탄생했다.”

 

‘개구리 장갑’도 김기훈의 작품이다. 왼쪽 장갑 끝에 에폭시수지를 붙여 곡선에서 마찰력을 감소시킴으로써 속도를 줄이지 않고도 코너를 돌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쇼트트랙 선수들 중 ‘외다리 주법’ ‘호리병 주법’ ‘개구리 장갑’을 사용하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동계올림픽 최초의 금메달이란 사실 외에도 김기훈은 쇼트트랙의 선구자 역할을 해낸 셈이다.

 

“처음에는 원리를 이해하기보단 보고 타고 느낀 걸 연습에 적용했다. 나중에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으며 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원리를 이해하고 나니 국가대표 주니어, 상비군,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도할 때 큰 도움이 됐다. 실기와 이론이 뒷받침된 상태에서 선수들에게 설명하니까 쉽게 전달된 것이다.”

 

김기훈은 대학에서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했고, 단국대에서 체육학 석사, 한국체육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는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의 불안에 관한 분석 연구’, 박사는 ‘빙상 선수의 지도자 행동 유형과 역할 모형 및 응집력의 관계’란 주제로 논문을 썼고 통과했다.

 

19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에서 한국대표팀의 마지막 주자였던 김기훈은 캐나다 선수한테 밀리는 상황에서 결승선을 통과하기 직전 한쪽 발을 쭉 앞으로 내밀었다. 쇼트트랙은 한쪽 스케이트 날이 결승선에 닿는 순간을 골인 기준으로 삼는다. 듣도 보도 못한 ‘날 들이밀기’는 1위로 달리던 캐나다 선수를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거는 환희로 뒤바뀌었다. 한국이 동계올림픽 단체전에서 거둔 첫 금메달이기도 했다.

 

김기훈의 ‘날 들이밀기’는 이후 후배들도 제대로 써먹었다. 김동성과 전이경이 19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녀 1000m에서 이 기술로 잇따라 금메달을 따내는 효과를 본 것이다. ‘날 들이밀기’는 선수들이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숨 막히는 승부를 연출하는 재미와 감동을 선사했다. 사진 판독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도 ‘날 들이밀기’ 때문이다.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은 김기훈에게 또 다른 의미의 올림픽이었다. 이번에는 지도자로 후배들을 이끌고 올림픽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이정수가 금메달을 획득할 때 감독 김기훈은 자신이 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 큰 기쁨을 만끽했다고 한다.

 

동계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 금메달을 안겨준 김기훈이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돌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젠 선수도, 지도자도 아닌 선수촌장으로

 

“선수생활을 하며 아시안게임,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메달을 다 땄지만 지도자로선 올림픽 메달이 없었다. 당시 울산과학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지도자로 올림픽 메달에 도전하고 싶어 학교에 1년 휴직계를 내고 대표팀을 맡았다. 그런 상황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얼마나 기뻤겠나. (이)정수의 금메달은 그동안 마음고생을 했던 부분을 충분히 해소시켜주고도 남을 만한 소중한 메달이었다.”

 

김기훈은 현역 시절 한 명의 선수와 줄곧 라이벌 관계로 부각됐다. 초등학교 선배인 이준호다. 이준호도 스피드스케이팅 단거리 선수 출신. 폭발적인 스타트와 파워는 국내 최강으로 꼽혔다. 1988년 캘거리동계올림픽 3000m 금메달을 목에 걸며 1500m 금메달리스트 김기훈과 함께 주목받았지만, 19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에서 1000m 동메달, 5000m 계주 금메달 획득으로 김기훈에 이은 2인자로 불렸다.

 

“그 형도 열심히 운동했던 분이다. 선수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는데 매스컴에서 우리를 라이벌 구도로 만들었다. 난 준호 형의 존재로 더 힘을 냈다. 더 노력했고, 더욱 내 자신을 채찍질했다. 선수 때는 라이벌로 부각되는 게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는데 돌이켜보면 그런 구도 자체가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대표팀에서 남자, 여자팀을 맡아 지도자 생활도 함께하다 내가 울산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자주 얼굴을 보지 못했다.”

 

1989년 영국 솔리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기훈은 언론으로부터 ‘아이언맨’이란 칭호를 얻었다. 자신했던 1500m에서 캐나다 선수한테 1위 자리를 내주는 바람에 포기하고 있었던 500m에 출전했고, 레이스 도중 무리해서 바깥으로 추월하다가 조총련계 북한 선수의 스케이트 날에 오른 발목 안쪽 복사뼈 위가 찍힌 것이다. 김기훈은 이때 마취 없이 네 바늘을 꿰맸다.

 

“도핑테스트 때문에 마취를 할 수 없었다. 얼음으로만 마사지한 후 생살을 꿰맨 것이다. 발목 상태를 봤을 때는 다음 날 경기를 포기해야 했지만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결국 퉁퉁 부은 발목을 얼음 마사지한 후 억지로 스케이트화를 신고 1000m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냈다. 그때 영국 언론이 나를 ‘아이언맨’이라고 부르더라. 피범벅이 된 채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정작 나로선 금메달보다 종합 1등을 못한 게 더 아쉬웠다.”

 

김기훈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강릉선수촌장에 임명됐다.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피겨스케이팅 등 빙상 종목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묵는 숙소의 최고 책임자로 평창올림픽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특히 북한 선수들이 강릉선수촌에 머물게 되면서 촌장 김기훈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3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한국의 동계올림픽이다. 그래서 더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난해 그리스에서 열린 성화 인수식에 참가하면서 감격했던 기억도 새롭다. 이젠 선수도, 지도자도 아닌 선수촌장으로 평창올림픽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 올림픽과는 이래저래 진하고 질긴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