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집결지 '창원 벽오동 가로수', 시민 덕에 명맥 유지
  • 경남 창원 = 이상욱 기자 (sisa524@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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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시민 청원 받아들여 벽오동 가로수 두 그루 마산 서항공원에 이식

“벽오동 가로수를 3·15 의거 기념탑 주변에 이식해달라”

 

지난해 8월 경남 창원 완월동에 사는 김광수씨(57)는 거주지 산복도로에 남아 있던 벽오동 나무를 역사 현장으로 옮겨 달라고 창원시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지난 50여 년 동안 민주성지인 마산의 역사를 지켜온 해당 나무를 창원시가 직접 잘 살펴봐달라는 요구다. 이 나무는 세월 흐름 속에 대부분 잘려나가고 겨우 2그루만 남았다. 

 

벽오동 가로수는 한때 지역의 상징이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을 생생하게 바라본 역사의 목격자였으며 주민들에게 추억 한두 개쯤은 족히 품게 해 준 나무다. 

 

지난 1월29일 창원 해운동 서항공원에 이식된 완월동 벽오동 가로수 2그루. ⓒ 창원시 제공


마산 현대사와 공존, 통합 창원시 갈등 치유 '상징'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완월동 일대에 가로수로 심어진 이 나무는 부마민주항쟁의 또다른 상징이다. 완월동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서성동 3·15 의거 탑으로 진출하기 위한 집결지였다. 벽오동은 대오를 짜고 뛰기 시작한 학생과 시민들을 묵묵히 지켜봤다. 앞서 1960년 마산 3·15의거도 이 벽오동 가로수 길을 거쳐 갔다. 

 

벽오동은 1970~80년대 우리나라 수출을 이끌었던 한일합섬과 마산자유무역지역의 근로자들과 동거했다. 당시 완월동은 인구가 2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근로자들의 자취방으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1990년대 마산자유무역지역이 쇠락하면서 그들이 떠날 때에도 벽오동은 말없이 지켜봤다. 

 

하지만 벽오동은 완월동 일대에 도로가 넓혀지면서 대부분 잘려나갔다. 겨우 남아 있던 2그루도 혹이 생기고 내부가 썩어가는 등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마저도 최근 도로 확장공사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3·15 의거 탑 주변 공간 없어 서항공원에 이식

 

이제 벽오동에 다시 눈길이 쏠렸다. 지난 1월29일 벽오동 가로수 2그루가 창원 해운동 서항공원에 옮겨지면서다. 비록 3·15 의거 탑 인근으로 이식되진 못했지만 마산 현대사와 함께 한 산증인의 명맥이 유지된 셈이다.

 

벽오동 가로수를 알리는 데는 시민 김광수씨가 큰 몫을 했다. 그는 “벽오동은 3·15 의거 등 마산 역사를 지켜본 목격자다”며 “도로공사로 잘려져 사라지는 것 보다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한다”고 했다. 청원 이후 창원시는 벽오동 이식을 발빠르게 처리했다. 수차례의 회의와 증언 수집 등을 통해 이식을 결정했다. 비록 3·15의거 탑 주변엔 여유 공간이 없어 김씨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5개월여 만에 서항공원에 이식했다. 

 

한 지역시민단체 관계자는 벽오동의 이식이 창원시 통합 후유증을 치유하는 한 방편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프로야구 NC 다이노스 구단의 전용구장 후보지 선정 등 창원시 통합 갈등을 없애려는 시도는 많았다. 그러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정책들이 제대로 결행된 적은 거의 없다. 마산의 현대사와 함께 한 벽오동의 성공적인 이식이 호평받는 까닭이다. 이 관계자는 “벽오동 이식은 부마민주항쟁 등 마산 현대사의 자존심을 지킨 작은 발걸음이다”며 “이런 작업들이 거듭된다면 진정으로 통합 창원시의 갈등도 서서히 풀려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창원시는 이식된 벽오동을 충전 치료 등으로 소생시킨 후 기념패를 세워 관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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