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 위험 수위 넘은 데이트폭력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8 13:29
  • 호수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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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0명 중 9명 “피해 경험 있다”…‘안전이별’ 신조어 나오기도

 

사랑해서 만나는 ‘연인’ 사이에도 일상적인 폭력이 발생한다. 지금까지는 ‘사랑싸움’으로 치부하며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겼다. 사생활 영역으로 간주돼 제3자의 개입은 금기시됐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벌어지는 폭력의 양상은 심각하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연평균 8965명이 데이트폭력으로 검거됐다. 매일 발생하는 데이트폭력 사범이 25명이나 된다는 얘기다. 지난해의 경우 총 8367명이 데이트폭력으로 검거됐다.

 

최근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데이트폭력 피해 실태조사’에서도 그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조사는 서울에서 1년 이상 거주한 여성(20~60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이번 조사에서 데이트폭력 피해 유형은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언어·정서·경제적 폭력까지 폭넓게 포함됐다. 빌려간 돈을 갚지 않거나 극심한 비난을 하는 경우 등도 정서적 폭력이라고 봤다.

 

‘데이트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1770명(88.5%)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10명 중 9명이 데이트폭력을 당한 셈이다. 폭력 피해를 당하고도 과반 이상(69.5%)은 경찰에 신고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한 경우는 신체적 폭력을 당한 경우가 가장 많았지만 이 역시 9.1%에 머물렀다. 신고하지 않고 넘어간 이유에 대해서는 ‘주변에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21.6%),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15.9%)라고 대답했다. 즉 데이트폭력 피해자 38%는 혼자 감내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 일러스트 오상민

 

보복범죄 두려움 때문에 이별 거짓말도

 

연인 간 데이트폭력은 결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헤어지자’는 이별통보는 보복범죄로 이어졌다. 많은 여성들이 스토킹·감금·구타·협박 등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해부터 유행하고 있는 ‘안전이별’은 이런 것을 빗대 나온 신조어다. 이별 후 보복범죄를 피하기 위해 불치병, 거액의 빚 등 온갖 거짓말을 해야만 무사히 이별할 수 있는 최근의 풍속도를 보여준다.

 

실제 이별선언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난 1월20일 새벽 전남 광양에서 남성 A씨(37)가 헤어진 여자친구를 마구 때려 숨지게 했다. 그는 경찰에 “말다툼을 벌이다 B씨(여·33)를 차 안에서 때렸는데 죽은 것 같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사건 현장인 광양시 중마동 도로에 주차된 승용차에 출동하니 B씨는 의식불명 상태였고, 얼굴에는 멍과 함께 피를 흘린 흔적이 있었다. B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경찰은 현장에 있던 A씨를 폭행치사 혐의로 체포했다.

 

2016년 4월19일 아침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졌다.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던 김아무개씨(32)에게 전 남자친구인 한아무개씨(32)가 무차별 흉기를 휘둘렀다. 김씨는 목·심장·옆구리 등 6곳을 찔렸다. 범행 현장에서는 한씨가 남기고 간 회칼·과도·로프·나일론끈·염산 등이 발견됐다.

 

한씨는 왜 헤어진 여자친구를 찾아가 잔인하게 죽인 것일까. 두 사람은 지인의 소개로 만났고, 처음에는 불타는 사랑을 했다.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하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잠시였다. 한씨는 점점 김씨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면 간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하지 않으면 화를 냈다. 어쩌다 말을 못하면 “왜 나한테 말 안 해”라면서 병적인 집착을 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김씨는 사귄 지 8개월 만인 2016년 2월 결별을 선언했다. 한씨는 헤어지자는 말에 “함께 죽자”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등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얼마 후부터는 한씨의 상상을 초월하는 협박과 잔혹한 스토킹이 시작된다. 수시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쉴 새 없이 문자와 협박전화를 했다. “예전 여자친구도 헤어질 때 죽이려다 실패해 다리만 부러뜨렸는데 너는 실패하지 않겠다”며 협박의 수위도 점점 높여갔다. 그러다 결국 살인으로 이어지며 비극적 결말이 났다.

 

“헤어지라”고 요구했다는 이유로 전 여자친구의 부모를 무참히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대학 신입생이던 권아무개씨(여·20)는 1년 선배인 장아무개씨(남·21)와 사귀기 시작했다. 술버릇이 좋지 않았던 장씨는 음주 후 권씨를 때리는 일이 잦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권씨 부모는 장씨 부모를 찾아가 “아들과 우리 딸이 만나지 못하게 해 달라” “우리 딸과 마주치지 않게 하라” “학교도 자퇴시켜라”라고 요구했다. 권씨 부모는 장씨에게도 딸과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다.

 

2014년 5월19일 장씨는 대구에 있는 권씨의 집에 배관공으로 위장해 침입했다. 장씨는 집 안에 있던 권씨 부모를 준비해 간 살인도구로 잔인하게 살해했다.

 

범행 후 장씨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핏자국이 보기 싫다며 숨진 부부 시신에 밀가루를 뿌리고 옆에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약 14시간 후 권씨가 들어오자 흉기를 들이대며 위협했다. 장씨는 살해된 부모 옆에서 권씨를 성폭행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권씨가 아파트 4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면서 장씨는 경찰에 검거됐다. 장씨는 현재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지난 5년(2012~16년) 동안 데이트폭력으로 숨진 사람은 467명으로 집계됐다. 한 달 평균 여성 7명이 데이트폭력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셈이다.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 여성단체 반발

 

데이트폭력을 일시적인 문제로 여기면 큰일이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데이트폭력은 가정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작지 않다. 데이트폭력을 경험한 상대자와 결혼한 기혼자들 중 17.4%가 ‘가정폭력으로 이어졌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즉 데이트폭력이 해결되지 않은 채 결혼하면 가정폭력으로 이어지는 등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데이트폭력’이나 ‘이별살인’이 횡행하고 있는 데는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도 한몫하고 있다. 최근의 사례는 데이트폭력에 대한 법원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7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의 한 주택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이아무개씨(남·39)가 여자친구 C씨(49)에게 외도 사실을 다그쳤다. 그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주먹으로 C씨의 얼굴 등을 수차례 폭행했다. C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이씨는 119에 신고했다. 하지만 끝내 C씨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씨는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회부됐다.

 

1월11일 의정부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는 이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석방했다. 재판부는 이런 판결에 대해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사실을 확인하고자 다그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으로 보이고, 피해자 유족 모두 피고인을 용서하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현행법상 ‘상해치사죄’의 법정 형량은 징역 3년 이상 30년 이하지만 대법원 양형기준은 징역 3년 이상 5년 이하의 형량을 선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번처럼 유족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이 악용의 소지도 있다고 우려한다. 데이트폭력을 가장한 계획적인 살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시민단체들의 반발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불꽃페미액션’은 1월30일 의정부지방법원 앞에서 ‘여성살해가 집행유예면, 판사도 공모자입니다!’를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단체는 “여성의 피해에 공감하지 못하고 가해 남성에 이입해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를 규탄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선진국들은 데이트폭력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하고 있다. 미국은 1990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최초로 ‘스토킹금지법’이 만들어졌다. 1994년에는 ‘여성폭력방지법’을 만들어 데이트폭력을 여성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피해자 구제제도도 강화했다.

 

영국은 2014년부터 ‘가정폭력 정보공개제도(일명 클레어법)’를 시행, 데이트 상대의 폭력 전과를 공개 열람할 수 있다. 경찰은 당사자의 요청이 없더라도 폭행 위험이 감지되면 폭력 전과를 당사자에게 알려줄 수 있다. 일본은 2013년 ‘가정폭력 방지법’을 개정해 가정폭력의 범위에 데이트 상대까지 포함시켜 해당 법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 생명이나 신체를 위협하는 폭력이나 협박 행위는 보호명령 대상이고, 가해자의 직접 접근뿐 아니라 전화나 팩스, 이메일 등을 사용한 행위도 접근금지 명령 대상이 될 수 있다.

 

데이트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자 경찰은 2016년 2월부터 전국 경찰관서에 ‘데이트폭력 근절 특별팀’을 편성해 운영 중이다. 데이트폭력 범죄는 신고 즉시 ‘연인 간 폭력근절 TF팀’으로 인계돼 전담수사가 이뤄진다. 여성 피해자들이 안정된 분위기에서 진술할 수 있도록 상담에는 여경이 배치된다. 보복이 우려되는 피해자들에게는 신변보호조치가 내려진다.

 

사귀는 관계에서 데이트폭력을 당했거나 이별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여성은 경찰의 이러한 제도를 적극 이용하는 것 또한 안전이별을 하는 방법이다. 형사적인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증거 확보가 필수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고, 관련 대화 내용을 녹취하거나 영상으로 녹화하는 등 피해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좋다. 카카오톡 등 문자메시지도 중요한 증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체크리스트] 반복되면 데이트폭력 의심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데이트폭력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데이트폭력 가해자인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연인들을 위해 대전서부경찰서는 최근 데이트폭력 근절을 위한 ‘데이트폭력 체크리스트’ 리플릿을 자체 제작했다. 욕설·폭행·강간 등을 제외하고도 데이트폭력으로 간주할 수 있는 행동들이다.

 

△나를 믿을 수 없다고 부당하게 비난한다 △내가 누구와 있는지 감시하고 확인한다 △통화 내역이나 문자 등 휴대전화를 수시로 체크한다 △전화, 문자 등에 바로 회신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 △자신의 폭력 성향 분출이 나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옷이나 헤어스타일을 자기 취향으로 강요한다 △만날 때마다 원하지 않는데도 스킨십을 요구한다 △헤어지자고 하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한다.

 

경찰은 “이러한 일이 반복적으로 이뤄진다면 데이트폭력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만일 당신의 연인이 이런 행동을 일회성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한다면 데이트폭력을 의심하고 상담을 받거나 신고하는 것이 좋다.

 

서상규 대전서부경찰서 경무계장은 “제작한 리플릿은 지역 카페·밴드 등에 게시하고 현장 홍보를 병행해 데이트폭력 예방에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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