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茶를 세계 3대 음료로 등극시킨 영국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9 13:58
  • 호수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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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Tea Road] 茶, 한때 동일 중량 금값에 거래될 정도로 고부가가치 상품

 ‘차(茶)’와 ‘티(Tea)’의 어원은 모두 중국에 있다. 차의 표준어 발음과 광둥성(廣東省) 발음은 [chá]다. 육로를 통해 중국차를 수입한 티베트·인도·러시아·이란·몽골은 [chá]로 부른다. 유럽국가 대부분은 푸젠성(福建省)과 해상무역으로 중국차를 유통했기에 푸젠성 방언 [ti, te, tay] 영향을 받아 [tiː]로 발음한다. 차를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포르투갈은 광둥성과 먼저 거래를 한 연유로 유럽에서 유일하게 [cha]라고 한다. 육상과 해상 양쪽을 통해 중국 문물이 들어온 우리나라는 ‘차’와 ‘다’를 함께 사용한다. 1602년 3월20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창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중국차를 수입해 유럽과 신대륙에 보급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0년 조직된 영국의 동인도회사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무역 규모나 세력은 영국 동인도회사를 압도했다. 세계 최초의 다국적기업인 동시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기도 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을 뿐 아니라, 현시가로 따지면 8조 달러에 달하는 인류 역사상 최대 자산을 가진 기업집단이었다. 80년 동안 스페인과 벌인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견인차였으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이끈 주역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을 거래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는 세계 최초로 증권거래소가 설립됐다.

 

1793년 9월 영국의 조지 매카트니 백작은 무역역조를 개선하기 위해 조지 3세의 친서를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상자에 담아 청나라 건륭제에게 전달했다. © 사진=서영수 제공

 

인류 역사상 최대 자산 가진 기업집단

 

1653년에서 1666년까지 조선에 억류당했다가 탈출한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역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다.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대만에 부임하는 신임 총독을 태운 범선 ‘스페르베르’의 서기로 근무하던 하멜은 인도네시아 바타비아(Batavia·자카르타 옛 지명)를 출발해 1653년 6월14일 대만 안핑(安平)에 도착했다. 교역물품을 실은 하멜과 63명의 선원이 승선한 ‘스페르베르’는 7월30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향했지만 태풍으로 8월16일 좌초됐다. 36명의 생존자는 제주도 해안에 상륙했다. 억류생활 14년 만에 조선을 탈출한 하멜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가 우리가 아는 《하멜 표류기》다.

 

원제목은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의 불행한 항해일지’지만 유사한 제명의 번역본이 많다. 하멜이 표류하던 시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해상무역을 제패하던 시기였다. ‘하멜 보고서’를 검토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최고 의결기구 ‘17인 위원회’는 네덜란드의 항구도시 미들버그에서 건조 중이던 범선 ‘요르카’를 ‘코리아’로 개명까지 하며 1669년 3월 배를 완성했다. 조선 탐사를 목적으로 1669년 5월20일 미들버그를 출항한 ‘코리아’는 일본 막부의 반대로 1679년 11월15일 폐선될 때까지 조선에 상륙하지 못했다.

 

해상무역의 꽃은 향신료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독점한 향신료를 중개무역으로 구매하던 영국은 영국 동인도회사를 동양에 진출시켜 직접무역을 원했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도 제압한 네덜란드 위세에 눌려 한물간 교역품인 인도산 후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영국 공화제정부 호국경(Lord Protector)에 취임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은 1651년 항해조례(Navigation Act)를 발표하며 해상무역을 독점하던 네덜란드에 도전했다. 1652년부터 3차에 걸친 전쟁은 네덜란드의 승리로 1674년 마무리됐다. 전쟁에 패했지만 해상무역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영국은 1689년 영국 동인도회사를 통해 중국에서 처음으로 차를 직수입할 수 있게 됐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선점한 중국차 시장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갔다. 1781년 해상무역을 장악한 네덜란드와 다시 맞붙은 영국은 1784년 네덜란드를 침몰시키고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피의 대가로 중국차 수입 주도권을 차지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유럽 전체에 차 문화를 확산시켰다. 남성만 출입이 허용되는 커피하우스를 밀어내고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티가든이 유럽 사교 문화로 번성했다. 비단과 도자기를 제치고 차가 교역품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네덜란드 전역을 투기판으로 만들었다가 1637년 거품이 빠지면서 수많은 투자자를 파산시킨 튤립 버블과 차는 달랐다.

 

양파 가격과 비슷했던 튤립 뿌리가 6000배 이상 가격이 폭등한 것과 달리 중국차는 원래 고가 상품이었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암호)화폐처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던 튤립 투자는 거래가격이 실제 가치와 무관한 투기광풍에 휘말리며 세계 최초로 버블경제라는 오명을 누렸다. 하지만 중국차는 머나먼 중국에서만 가져올 수 있었으며,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차 수입 헤게모니를 쥐고 통제했다. 동일 중량의 금값에 거래되던 차는 유통량이 급증하며 동일 중량의 은값으로 하락했지만 여전히 고가이면서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다. 연간 10만톤이 넘는 중국차 수입대금을 결제하기 위해 영국이 보유한 은은 물론 약탈과 채굴로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은도 모두 중국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파산을 막기 위해 영국은 중국차를 네덜란드와 밀거래하던 아메리카 식민지 13개 주를 통제하려다가 오히려 신대륙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됐다.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건륭제의 ‘삼궤구고두례’를 거부한 조지 메카트니 백작(왼쪽 사진)과 청나라 건륭제 © 사진=서영수 제공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경쟁적 거래

 

영국 동인도회사는 국왕 조지 3세의 재가를 받아 계몽주의 신봉자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백작을 대표로 95명의 사절단을 구성했다. 1792년 9월25일 영국을 출발한 매카트니는 중국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과 무역역조를 개선하기 위한 자유무역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1793년 9월14일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를 알현하면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서양인 최초로 거부한 매카트니는 조지 3세의 친서를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상자에 담아 전달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자유무역을 원했던 유럽 최강 영국을 청나라는 변방에서 온 속국이 조공을 바치러 온 정도로 치부했다.

 

중국차 수입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고갈되는 은을 대체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중국에 유행시킨 아편에 주목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아편을 대량생산해 중국에 공급했다. 치료 목적으로만 일부 허용되던 아편이 담배처럼 흡연 방식으로 바뀌면서 중국인은 전 세계 아편 95%를 소비하게 됐다. 신생독립국가였던 미국도 터키에서 아편을 가져와 판매했다. 아편 판매는 부도덕했지만 효과는 컸다. 중국차 수입으로 발생한 무역역조가 뒤집어졌다. 중국에서 은이 유출돼 영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중국과 2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중국차 공급이 불안정해졌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수십 년에 걸친 장기 계획으로 인도에서 차를 생산하게 됐다. 차를 전량 수입에만 의존하던 영국은 차를 자체 생산하며 차 수출국으로 변신했다. 차는 중국에서 출발했지만 세계 3대 음료로 등극시킨 것은 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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