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판 위를 걷는 한반도의 대화 분위기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05 13:31
  • 호수 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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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Insight] 김정은의 평화 제스처, ‘전략적 후퇴’냐 ‘백기투항’이냐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남북한과 미국의 움직임이 다시 부산해졌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사실상 마무리되면서 각자의 존재감이나 향후 협상 입지를 다지기 위한 포석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동계패럴림픽(3월9~18일)까지 끝나게 되면 한·미 양국은 올림픽을 ‘평화’ 모드로 치르기 위해 미뤘던 합동군사연습을 재개하게 된다. 북한은 여기에 강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어 다시 정세가 얼어붙을 공산이 크다. 때문에 3월 하순 이전에 남북한과 미국이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지 못할 경우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마련됐던 대화 분위기는 ‘반짝 봄날’에 그칠지 모른다는 지적이다.

 

2월25일 강원도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보좌관(문 대통령 왼쪽), 류옌둥 중국 국무원 부총리(이방카 왼쪽) 등이 참석해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한·미 군사훈련으로 ‘반짝 봄날’에 그치나

 

가장 주목되는 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대화공세 쪽으로 급선회한 북한의 셈법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개막식에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파견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고위급 대표단이지만 김여정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졌다. 그녀가 특사 역할을 수행하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와 함께 평양 초청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이었다. 김여정을 활용한 김정은의 대남 평화공세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점철된 지난 한 해의 ‘도발자’ 이미지를 벗고 평화 메시지를 담은 올리브 가지를 흔들어 보이는 데 김여정이란 모델은 안성맞춤이었다.

 

김정은은 평창올림픽 폐막식에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보냈다. 불과 보름 만에 또다시 고위급 대표단을 서울에 파견한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양 초청의사를 거듭 밝혔다. 그만큼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김정은이 공을 들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폐막식 참석을 제외하고 김영철은 남한 체류 2박3일 대부분을 서울 워커힐호텔에 머물렀다. 이곳 17층 스위트룸에 투숙한 그는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 등을 잇달아 만나 남북관계 재가동과 함께 북·미 대화와 비핵화 문제 등 향후 정세 흐름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영철이 북·미 대화 필요성을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전달되기는 했지만 “남조선과 미국의 합동군사연습 재개는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등 남북 간에 입장차가 확연한 대목도 적지 않아 보인다.

 

청와대와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 모멘텀을 유지하면서 이를 북·미 간 대화와 관계정상화로 이끌고 가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온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과 북한 김여정의 비공개 접촉을 주선하려다 무산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북·미 관계나 비핵화 문제에서 진전이 없을 경우 남북대화도 일정한 한계가 있을 것이란 게 우리 정부의 판단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며 사실상 조건을 단 것도 이런 현실적 인식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김여정과 김영철의 잇단 남한 방문에 호응해 대북특사 파견을 결정한 것도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비롯한 문 대통령과 우리 정부의 구상을 김정은에게 직접 설명하기 위한 측면에서다. 문 대통령이 3월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대북특사 파견 방침을 밝히고 향후 남북관계와 관련한 사안을 미국 측과 긴밀히 협의하기로 한 것도 남북대화의 진전만으론 근본적인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미 대화나 남북관계 진전 등과 관련한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은 명료하면서도 단호해 보인다. 대북특사 파견 입장을 밝힌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통화에 대해서도 백악관은 “북한과의 어떤 대화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는 분명하고 확고한 목표를 갖고 진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두 대통령이 이런 굳건한 입장을 확인했다며 긴밀한 협조가 이뤄질 것이란 기대를 나타내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평양 측에 보내고 있다. 그는 2월26일 백악관에서 열린 주지사 연례회동 자리에서 북·미 대화와 관련해 “그들(북)은 대화를 원하고 있으나 우리는 오직 적절한 조건(right conditions) 아래서만 대화하기를 원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앞서 2월23일 미 재무부가 선박 28척과 27개 해운 및 무역업체, 개인 1명 등 총 56개 대상에 대한 새로운 대북제재를 발표한 것과 관련해 “그 제재가 효과가 없으면 우리는 제2단계로 가야 할 것”이라며 “2단계는 매우 거친 것이 될 수도 있고 전 세계에 매우, 매우 불행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미국의 이런 까칠한 대북 대응에 북한은 거친 목소리로 비난을 퍼붓고 있다. 북한은 3월1일 외무성 ‘미국연구소 정책연구실장’ 명의 담화에서 “아직도 제재와 압박이 우리에게 통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에 광적으로 달라붙는 트럼프 패의 처지가 가긍하기(불쌍하기) 짝이 없다”고 밝혔다. 담화는 트럼프의 ‘2단계 행동’ 언급에 대해서도 “폭언으로 감히 우리를 놀래워 보려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궤변에 익숙해진 지 오래며 그에 대처할 방식도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노동신문은 2월23일 “그 어떤 제재도 도발도 위협도 우리의 핵보유국 지위를 절대로 허물 수 없다”며 “우리 공화국이 핵을 포기할 것을 바라는 것은 바닷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란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가운데)이 2월27일 북으로 돌아가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겉으로 강하게 반발하는 北 진짜 속내는?

 

하지만 이런 대외 선전전이나 주장과 달리 내부적으로 미국과의 대화 모색에 부심하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미국과의 대화를 물밑에서 타진하는 한편 대화에 나서기 위한 명분 마련에도 나서고 있다는 얘기다. 김영철이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고위 정부 당국자들과의 대화에서 한·미 합동군사연습 재개 등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면서도, 북·미 대화 필요성이나 북한 비핵화 문제에 크게 반발하지 않은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전체적으로 북·미 대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 대화를 위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인지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며 “우리는 중매를 서는 입장이고 북·미 양측 입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북쪽에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고 북측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아는 미국 입장을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는 김여정 특사 방문 시 우리 측이 북·미 대화 필요성을 강조했을 때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남북대화 과정에서 북한이 북·미 대화 문제 등이 거론되는 데 대해 반발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전과 다른 점이다. 과거엔 “그건 우리와 미국의 문제”라거나 “핵 문제는 철두철미 평양과 워싱턴 사이에 다룰 것이며 남조선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선을 그어왔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북한이 내심 문재인 정부가 북·미 간 대화 중재에 나서주는 걸 원하거나 반기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이 대미 접촉 중재를 해외에 요청하고 나선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는 2월17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미 간의 관계개선은 국제적인 문제이고 국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이 긍정적인 역할을 해 달라는 구체적인 요청을 지난해 10월 리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외교위원장으로부터 받았다”고 공개했다. 당시는 북한이 9월3일 6차 핵실험을 벌이고 같은 달 15일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을 발사하는 등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때다.

 

북한이 김정은 신년사를 통해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공언하면서 대화 모드로 돌아선 것을 두고서도 “적어도 2~3개월의 검토와 준비 작업을 거쳐 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10월 북한 당국이 올림픽에 참가할 응원단을 선발하는 등 준비 작업을 벌였다는 대북 소식통의 전언도 맥을 같이한다는 얘기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한 뒤 6차 핵실험을 정점으로 도발 모드를 선보인 뒤, 김정은의 ‘국가 핵무력 완성’ 선언을 기점으로 이후 대화 선회 전략을 짰을 것이란 진단이다.

 

북한의 이런 태도변화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강경 노선이 결정적 작용을 했다는 데 대북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핵과 미사일 도발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달리 미국 측이 대북제재와 압박 수위를 낮추거나 대북 설득에 나서지 않자 김정은이 생존전략 차원에서 대화 쪽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측면에서다. 유엔 안보리의 거듭된 대북제재 결의에 북한 후견국을 자처해 온 중국까지 참여하고, 제재의 틈을 촘촘히 틀어막는 조치가 이어지자 올림픽을 계기로 대화 쪽으로 돌아선 것이란 얘기다.

 

 

트럼프의 연이은 경고에 北 위기감 커져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 군사행동까지 염두에 둔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이 김정은과 북한 최고지도부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했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김정은을 겨냥한 참수작전이 공론화되고 미군이 구체적인 훈련까지 벌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포에 가까운 위기감을 느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런 트럼프 행정부의 움직임은 평창올림픽 기간에도 계속됐다. 2월28일 뉴욕타임스(NYT)는 미군 고위 관계자들이 북한을 겨냥한 전시작전 계획을 검토한 사실을 보도했다. 미군 사령관들이 ‘탁상 훈련(Tabletop Exercise)’으로 불리는 전시작전 계획에 대한 논의를 2월 하순 하와이에서 진행했다는 것이다. NYT는 “미 재래식 정규군과 특수부대가 북한 핵시설을 목표물 삼아 단계별로 배치되는 상황이 설정됐다”는 구체적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이런 보도에 대해 미 국방부는 “전 세계의 우발적인 상황에 대비한 지속적인 계획”이란 입장을 내놓아 사실상 훈련 실시 사실을 인정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북·미 대화가 북한 비핵화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며 김정은에게 핵 포기를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마크 내퍼 주한 미국 대사대리도 2월28일 한국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비핵화라고 하는 명시된(stated) 목표가 없는, 북한의 지속적 핵·미사일 프로그램 개발의 시간 벌기용으로 끝날 북·미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거센 대북 압박 속에서 펼쳐지는 한국 정부의 북·미 대화 중재 노력, 특히 대북특사 파견에 북한 김정은이 어떤 대응카드를 들고나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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