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내서 성폭력 피해 공개했다 고소당하는 여성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18.03.07 13:42
  • 호수 148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법조·문화·예술계서 재계로 ‘미투 열풍’ 급속 확산…“폭로 여성 2차 피해 막을 제도 개선 절실”

 

“나도 당했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미투(me too)’ 열풍이 법조계와 문화·예술계, 종교계를 넘어 재계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주요 포털이나 익명의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에는 현재 비슷한 피해를 호소하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일부 대기업의 경우 총수들의 이름까지 거론되는 등 피해 신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가장 먼저 ‘폭탄’을 맞았다. 직장인 익명 게시판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에는 최근 ‘박삼구 회장이 아시아나항공 여성 승무원들에게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했다’는 취지의 글이 게재됐다. 박 회장은 매달 첫째 주 목요일에 서울 강서구 아시아나항공 본사를 방문한다. 업무보고 차원이었지만, 여승무원들은 1층 로비에서 박 회장을 기다렸다가 박수를 쳐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박 회장이 여승무원을 껴안거나 손을 주물러 수치스러웠다는 게 제보 내용이다. 일부 직원들은 “박 회장이 양팔을 벌리면 ‘달려가 안겨야 한다’거나 ‘팔짱을 끼고 보고 싶다고 말하라’고 파트장 등으로부터 교육까지 받았다”고 토로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측은 “직원 격려 방문은 오래된 소통경영의 일환”이라며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을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박 회장이 직접 사과문을 아시아나항공 사내망에 올렸다. 박 회장은 2월12일 “전적으로 내 불찰이고 책임”이라면서 “불편함을 겪은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행보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박 회장과 임원들이 매년 여직원 100여 명과 함께 골프 행사를 갖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프로그램이 포함됐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돼 내부적으로 뒷말이 나왔다. 미래에셋그룹 측은 “여직원 사기 진작을 위한 행사로 강제성은 없었다. 참가신청서 역시 자발적으로 받았다”며 논란을 일축했다. 실제로  미래에셋 노동조합은 관련 논란이 일자 자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행사 참석 임직원을 대상으로 사실 관계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전체 참석자의 80%가 이 조사에 응했고, 우려와 달리 강압적인 분위기는 없었던 것으로 내부적인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여성의 날인 3월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여성의 날 민주노총 전국 여성노동자대회에서 한 참석자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주요 그룹 총수들도 성폭력 가해자 거론

 

기업들의 경우 조용히 묻혔던 사건이 갑자기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홍역을 치르고 있다. 한 대형 증권사의 경우 간부가 성추행 혐의로 사내 인사위원회에서 정직 2개월을 통보받기도 했다. 이 간부는 과거 저녁 회식자리에서 여직원에게 스킨십 등을 시도하는 등 성추행을 저질렀다. 이를 저지하는 같은 지점 소속 남자직원을 폭행한 혐의도 받고 있다. 그는 2월 중순 정직 통보를 받고 자진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미투 쓰나미’가 재계를 강타하고 있다. 분위기에 눌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성폭력 피해 사례가 재계에 그만큼 많았다는 방증이다. 한 남성의 경우 동성 성폭력 피해 글을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올려 주목을 받았다. 이 네티즌은 “K보험사에서 근무하는 상사에게 강제추행 및 폭행을 당해 전치 3주(인대 파열)의 부상을 입었다”며 “목격자가 5명 있어 회사에 알렸지만 ‘집단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회사 측도 ‘동성 간의 사건이기에 성추행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해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 익명 제보 쇄도

 

몇 년 전의 일이 갑자기 도마에 오른 기업들은 당혹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피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내부 감사에 착수했다. 여직원이 나중에 선처를 호소하는 의견서를 제출했을 정도로 신속히 민원을 처리했다”며 “민감한 시기에 이런 문제가 불거져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재계 인사들은 많지 않았다.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직장 내 성폭력 의혹이 불거졌지만 그때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악습이 반복됐다. 기업들의 대응 태도도 문제로 꼽히고 있다. 겉으로는 재발 방지 약속과 함께 “진상조사를 통해 문제가 나올 경우 일벌백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 데 급급한 모습이었다. 문제가 나와도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했다. 그동안 곪았던 고름이 서지현 검사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오고 있는 만큼, 유사 사례가 당분간 계속해서 나올 것으로 재계에서는 보고 있다.

 

실제로 김준기 전 DB그룹 회장은 3년간 함께 일하던 여비서를 상습적으로 성추행하다 최근 고소를 당했다. 김 회장은 경찰 조사 과정에서 미국으로 떠났다. 경찰의 출석 요구도 무시했다. 결국 경찰은 김 전 회장의 여권 무효화를 외교부에 요청했다. 그러자 김 회장은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에 의해 기각당했다. 최호식 전 호식이두마리치킨 회장 역시 20대 여직원과 식사 중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범(汎)현대가인 성우전자 정몽훈 회장은 2016년 9월 서울 강남의 한 고급 음식점에서 20대 알바생에게 강제 키스를 시도하다 경찰에 입건된 바 있다.

 

© 사진=연합뉴스


 

피해 사실 잘못 공개했다가 회사서 ‘꽃뱀’ 취급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2차 피해다. 어렵게 성희롱이나 성폭행 사실을 신고했지만, 피해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주변의 수군거림과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때문에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은 대부분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도 2차 피해를 우려해 참고 넘기기 일쑤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은 모두 728건이었다. 이 중 556건(76.4%)이 행정종결 처리됐다. 민원이 사건화돼 재판에 넘겨진 것은 4건(0.6%)에 불과했다. 피해자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가해자와 합의했기 때문이다. 과태료 처분을 받은 97건을 합쳐도 가해자가 처벌받은 것은 전체의 13% 정도에 불과했다.

 

지난해 11월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한샘 여직원 성폭력 사건이 대표적이다. 한샘 신입사원 A씨는 연초 팀 회식 이후 교육 담당자인 B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A씨는 B씨를 경찰에 신고하면서 회사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회사는 사건을 축소하고 덮기에 급급했다. 회사 인사팀장인 C씨가 허위 진술을 요구하며 또다시 부적절한 접촉을 시도했다. 참다못한 A씨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여파는 컸다. A씨의 글은 삽시간에 퍼졌고, 한샘을 비난하는 글들이 인터넷에 도배가 됐다. 다른 직장에서 비슷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글도 잇따랐다. 서지현 검사가 한국에 ‘미투 운동’을 확산시킨 주인공이지만, 원조는 A씨였던 것이다. 하지만 A씨는 사내에서 ‘꽃뱀’ 취급을 받았다. 회사 측은 뒤늦게 유급 휴직을 권하며 심리상담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지만, 정상적인 회사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A씨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지 한 달여 만에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법률사무소 나란의 오지원 변호사는 부실한 회사 내 성범죄 처리 시스템으로 인터넷을 찾는 여성들이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충고한다. 그는 최근 시사저널과 만나 “인터넷에 어려움을 알리는 것은 자칫 법적 문제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정말 마지막 수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며 “그 전에 최대한 본인에게 공감해 주면서 가해자가 상응한 징계와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심리적 지지자와 법률적 지지자를 찾아 함께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비슷한 시기 A씨의 글을 읽고 용기를 내서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는 현대카드 직원 D씨의 처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현대카드 위촉사원이라고 밝힌 D씨는 당시 “5월 회식 후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팀장 E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성폭력상담소의 도움을 받아 E씨를 신고했지만, 경찰은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후 무고 혐의로 피소돼 경찰 조사를 받았다가 혐의 없음으로 종결됐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역고소’를 허용하는 법이 자칫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조현욱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드러내면 거꾸로 가해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며 “우리 사회에 들풀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이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관련 법조항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자 역시 최근 모 경찰서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 기업 간부가 지난해 5월 다른 직원이 보는 앞에서 여직원을 성희롱했다’는 주장을 보도한 것 때문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고소 여성에 대한 회사 측의 고소장이 접수돼 확인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여성이 허위 사실을 인터넷에 올렸거나, 경찰에 신고했다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미투 운동’을 악용한 허위 사실 유포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재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이 어렵게 용기를 내서 미투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을 위축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