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위 대북 제재’ 김정은 통치자금도 초비상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27 11:50
  • 호수 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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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Insight] 3대에 걸쳐 비밀 관리…스위스 비밀계좌에 수십억 달러 예치說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1월 올해 첫 공개활동 일정으로 국가과학원을 찾았다. 당시 김정은은 “과학자들이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정말 큰일을 하고 있다”고 격려했다는 게 같은 달 12일자 관영매체들의 전언이다. 그런데 이 보도에는 특이한 대목이 포함돼 있었다. 김 위원장이 국가과학원에 ‘특별상금’을 전달했다는 내용이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가 현지방문에 맞춰 공장·기업소와 군부대 등에 선물을 주거나 숙원사업을 해결해 주는 경우는 적지 않다. 하지만 격려금 명목의 현금을 직접 전달한 사실이 공개된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대북 부처 당국자는 “김정은이 과학기술 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선전하는 것과 함께 지난해 핵·미사일 기술 개발에 매달렸던 과학자들을 격려하는 차원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정은은 앞서 2015년 9월에도 주민들에게 특별상금을 내렸다. 노동당 창건 70주년(10월10일)을 앞두고 군 장병과 근로자, 연금이나 보조금을 받는 모든 주민에게 축하금 성격의 현금 지급조치를 취한 것이다. 당시 금액은 월 기준 생활비의 100%로, 북한 당국이 주민에게 월급을 기준 삼아 특별상금을 지급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일성·김정일 집권 시기에는 재일 조총련에 대한 교육비 지원 사례 외에 현금이 하달된 경우가 공개된 경우는 드물었다. 고위 탈북 인사는 “김일성이 통치하던 1989년 북한이 서울올림픽에 대응해 치른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맞춰 직장에 다니는 주민과 대학생에 한해 특별상금을 지급한 적이 있다”며 “김정은 시기 들어 현금을 동원한 충성 유도나 주민 불만 달래기가 잦아졌다”고 말했다.

 

1월1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가운데)이 평양의 무궤도 버스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EPA연합


 

김정은, 돈 뿌려 충성 유도 등 주민 달래기 나서

 

문제는 전례 없이 높은 강도의 대북제재가 지속되면서 자금 조달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점이다. 현장방문 시 격려금이나 선물 등을 마련하는 데 쓰이는 김정은의 통치자금도 빠듯해졌을 것이라고 대북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북한 정권을 떠받드는 군부와 노동당 간부, 과학자·기술자 등 엘리트 그룹의 체제 이반을 막는 데 필요한 자금 마련에 문제가 생겼다는 첩보가 잇따르고 있다는 게 대북 정보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일각에선 이 같은 상황이 김정은의 위기의식을 불렀고,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등 유화 국면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된 배경 중 하나라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 김씨 정권의 통치자금과 관련한 구체적 진술은 1990년대 중반 탈북·망명한 강명도씨로부터 나왔다.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로 알려진 강씨는 우리의 청와대에 해당하는 주석궁 직할 외화벌이 회사인 능라888 무역의 부사장을 지냈다. 그는 우리 정보 당국에 “스위스 은행 내의 김정일 비밀계좌에는 20억 달러 상당의 비자금이 예치돼 있다”고 알렸다.

 

이 자금에 대해선 북한의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자금줄 차단에 주력해 온 미 재무부도 오래전부터 주목하고 있다. 이미 2013년 봄 데이비드 코언 당시 미 재무부 테러금융정보 차관은 김정은의 해외 불법 통치자금과 관련해 “비자금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으며, 발견되면 사용할 수 없도록 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작업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 비자금의 규모나 계좌 등은 베일에 싸여 있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최고지도자의 자금운용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는 데다, 스위스 등의 해외자금도 파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70년 넘게 3대에 걸친 부자세습이 이뤄지며 독재 권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천문학적 규모일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최고지도자의 통치자금은 북한에서 ‘주석폰트’라고 불린다. ‘폰트’란 용어는 북한에선 일정한 목적에 쓸 자금이나 물건을 말한다. 주석폰트는 과거 국가주석 김일성이 직접 특정 경제 분야의 부흥이나 지원을 위해 특별히 대주는 자금의 성격이었지만 차츰 규모가 불어나면서 통치자금으로 자리했다고 한다.

 

이 자금을 관리하기 위한 전담부서까지 두고 있다. 핵심 측근이 포진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39호실’이 바로 그곳이다. 39호실은 비자금 확보와 운용을 위해 수익성이 높은 알토란 무역업체나 공장·기업소를 거느리고 있다. 이를 통해 금·은 같은 귀금속은 물론 송이·조개 등 주요 수출품을 독점적으로 관장한다. 해외에 독자적인 금융기관까지 진출시키기도 했다.

 

북·중 교역 거점인 중국 랴오닝성 단둥과 북한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대교 © 사진=AP연합


 

노동당 산하 39호실이 비밀리에 관리

 

과거 핵 개발 의혹이 제기되거나 미국에 의한 대북제재가 내려졌을 때도 북한의 외화벌이엔 큰 차질이 없었다. 제재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데다 후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산소호흡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6차 핵실험 감행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개발이 상황을 바꿔버렸다. 워싱턴 타격을 위협하며 ‘국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김정은에게 미국과 유엔은 물론 중국까지 나서 제재의 고삐를 죄고 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3월19일 한 세미나에서 “대북제재로 인한 북한의 경제적 부담이 핵 개발로 얻는 이익을 초과했다”며 “내부 동요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북한이 대화에 나선 것”이라고 진단했다.

 

3월17일 공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의 보고서에는 촘촘한 전방위 압박으로 인해 숨이 턱까지 차오른 북한의 모습이 담겨 있다. 북한이 각종 불법행위를 통해 지난 한 해 적어도 2억 달러(2100억원)를 벌어들였다고 지적한 위원회는 불법 무기 거래 등 외화벌이를 차단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촉구했다.

 

북한은 인도로부터 지난해 1~6월 57만8000달러 규모의 귀금속과 보석용 원석을 수입했다. 이 가운데 다이아몬드가 51만4000달러(5억4000여만원)에 달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독일과 이탈리아·칠레 등으로부터 고급 와인을 수입한 내용까지 고스란히 파악돼 있다.

 

김정은은 국가과학원 방문 당시 ‘자립적 민족경제’를 강조하면서 “적들이 10년, 100년을 제재한다고 하여도 뚫지 못할 난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년사를 통해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등 유화 제스처를 내놓은 김정은은 결국 서울과 워싱턴을 향해 정상회담 카드를 던졌다. 그의 말과 달리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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