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김정일보다 공포정치에 더 의존하는가?
  •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2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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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장의 김정은 바로 알기] ‘운구차 7인방’ 전원이 숙청됐다는 보도는 사실과 달라

 

박근혜 정부와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집권 초 그가 유럽 유학을 경험했고 20대 후반의 젊은 지도자라는 점에서 그에 대해 희망 섞인 전망도 나왔지만, 그는 오직 3대 세습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고모부를 비롯한 많은 고위 간부와 주민들을 공개 총살하고 숙청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킨 셈이다. 우리 사회의 다수 언론도 정확한 팩트 확인 없이 이에 동조했다. 그동안 언론들이 김정은 위원장의 ‘포악성’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언급했던 것이 2011년 12월 김정일 영결식에서 영구차를 호위했던 ‘운구차 7인방’의 운명이다.

 

국내의 다수 언론들은 “거듭된 숙청으로 김정일 사망 당시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점쳐졌던 총참모장 리영호,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등 이른바 ‘운구차 7인방’은 모두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의 1인 지배체제 강화 차원에서 ‘운구차 7인방’이 모두 숙청된 듯이 보도한 셈이다. 

 

김 위원장과 함께 영구차를 호위했던 7인은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김기남 당중앙위원회 비서, 최태복 당중앙위원회 비서, 리영호 총참모장,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이었다.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2011년 12월28일 평양 금수산 기념궁전 앞 광장에서 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 영결식에서 김 위원장의 운구차량을 호위하고 있다. 김정은 부위원장 뒤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과 건너편으로 리영호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있다. © 사진=조선중앙통신 연합


 

장성택 처형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다”는 시각도

 

이 중에서 리영호 총참모장은 과거 군부가 관장하던 외화벌이 사업을 당과 내각으로 이전하는데 반발하다가 2012년 7월에 해임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김정은은 같은 해 5월14일 “군대가 너무 돈맛을 들였다. 총과 총알은 당과 국가가 만들어 주겠으니 군대는 싸움만 잘하면 된다”라고도 지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리영호의 해임은 김정은의 1인 지배체제 강화와는 무관한 군부 개혁 과정에서 이루어진 숙청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은 2013년 12월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와 “권력을 남용하여 부정부패 행위를 일삼고 여러 여성들과 부당한 관계를 가졌으며 고급식당의 뒷골방들에서 술놀이와 먹자판을 벌렸다”는 혐의 등으로 숙청되었다. 북한과 같은 스탈린주의적 권력체계에서 ‘종파행위’는 가장 심각한 ‘반당․반혁명’ 행위에 해당하므로 처형을 면하기 어렵다. 신뢰할만한 복수의 소식통에 의하면 장성택이 많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가진 자식들이 15명도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의 요리사로서 장성택을 여러 차례 만날 수 있었던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와의 2008년과 2013년 인터뷰에서 장성택이 기쁨조를 관리했으며, 그가 관계하지 않은 기쁨조 여성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만약 장성택 생존 시 북한에서도 ‘미투(Me Too)’ 운동이 벌어졌다면 장성택이 가장 중요한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북한 내부 사정에 비교적 밝은 일본 소식통에 의하면, 김경희의 지속적인 요청에 의해 김정일은 2011년 사망하기 전에 김경희와 장성택의 이혼을 승인했다고 한다. 만약 이 같은 정보가 사실이라면 장성택은 숙청 시점에서 김정은의 ‘고모부’가 아니다. 

 

김기남과 최태복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해 10월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은퇴했다. 당시 그들의 나이는 각기 88세와 87세였으므로 퇴장 이유는 고령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영춘은 2013년 4월 인민무력부장직에서 해임되었지만 당중앙위원회 군사부장직을 맡고 있다가 은퇴했으므로 숙청과는 무관하다. 2013년에 김영춘의 나이가 77세였으므로 당시 그의 해임도 고령에 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김정각은 2013년 4월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서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했다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직으로 이동했다. 그 후 김정각은 인민무력성 제1부상직으로 다시 이동했다가 올해에는 인민군 총정치국장이라는 군부 1인자 직책에 올랐으므로 그의 직책 이동도 숙청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마지막으로 우동측 전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은 2012년 3월 뇌출혈로 쓰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퇴장도 정치적인 숙청과는 관련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운구차 7인방’의 운명을 분석해보면 장성택을 제외하고는 김정은의 1인 지배체제 강화를 위해 숙청된 인물은 없다. 장성택도 북한이 ‘처형’했다고 발표했지만, 신뢰할만한 복수의 소식통들은 “처형을 목격한 고위 간부가 없다”고 하고 있고, 심지어 “그가 가택연금 상태로 여전히 생존해 있다”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어 ‘처형’ 여부도 불확실하다.

  

박근혜 정부와 다수의 전문가는 김정은의 ‘즉흥적’인 결정에 의해 김정일 시대보다 더 많은 간부들이 숙청된 것처럼 주장했는데 이는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은 김정은 집권 이후 약 3년 6개월 동안 약 70여명의 간부들이 숙청되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김일성 사망 후인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약 3년 동안 이른바 ‘심화조사건’을 통해 숙청된 간부들은 적어도 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김정은 집권 이후 70여명의 간부가 숙청되었다면 그 숫자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김정일 시대 ‘심화조사건’사건의 3.5% 정도에 불과하다. 

 

‘심화조사건’으로 당시 최고 핵심 실세였던 문성술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본부당 책임비서까지 처형되었으므로 김정일 시대에도 핵심 간부들이 결코 숙청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박근혜 정부 시기 국정원이 ‘숙청’되었다고 발표한 북한 간부들 중 일부는 얼마 후 복권되거나 다른 직책으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어 실제 숙청 규모는 국정원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적을 수 있다. 

 

김정은이 공포정치에 의존하고 있는 데에는 간부들을 확고하게 통제하기 위한 의도 외에도 남북관계 경색과 국제적 고립이라는 요인 등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대외관계가 개선되고 김 위원장이 통치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면 공포정치에 대한 의존도는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 본 연재 내용은 출처가 ‘스토리오브서울’(www.storyofseoul.com)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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