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3차 남북회담은 냉전 해체의 현실화”
  • 유지만 기자 (redpill@sisajournal.com)
  • 승인 2018.04.30 13:29
  • 호수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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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차 정상회담 明]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前 통일부 장관)

 

남과 북의 세 번째 정상회담이 4월27일 판문점에서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악수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였다. 이번 정상회담은 2000년과 2007년의 정상회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당시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는 형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양 정상이 중간지대인 판문점에서 만났다는 것부터 다르다. 또 핵 무력 완성을 자처하는 북한의 핵 포기 문제와 군사적 긴장을 완화할 종전선언도 큰 이슈 중 하나다.

 

노무현 정권 시절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은 이번 정상회담을 두고 “냉전 해체와 평화협정 체결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시사저널은 남북 정상회담 직전인 4월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정 의원을 인터뷰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1·2차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고 있나.

 

“그동안 남북관계는 세계적 흐름과 어긋났다. 1975년 헬싱키 조약으로 동서냉전 무드가 풀리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5년 뒤에 독일이 통일됐다. 동서냉전이 끝나는 시점이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갈등이 풀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국에는 독재정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엔 유신정권이었고 80년대는 전두환 정권이었다. 세계적으로는 대치국면이 풀리고 있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황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2차 정상회담은 뒤늦게나마 대치국면을 화해국면으로 바꾼 성과를 거뒀다. 한반도적 화해협력 흐름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번 3차 정상회담으로 냉전 해체 시대에 접어들었다.”

 

 

1·2차 정상회담으로 화해 무드가 조성됐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

 

“1992년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발효됐다. 하지만 곧 효력이 무력화됐고, 대결국면으로 들어갔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 남북관계가 얼어붙지 않았나. 이 때문에 2000년과 2007년 정상회담을 통해 닫힌 문을 다시 열어야 했다. 3차 정상회담의 화두는 1·2차 정상회담의 정신을 이은 냉전 해체와 화해 무드 조성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과거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것 같다. 정상회담 장소도 평양이 아닌 판문점이라는 점이 상징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1·2차 정상회담은 모두 남측에서 북을 설득했던 결과다.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대화로 이끌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먼저 제안하다시피 한 회담이다. 북·미 정상회담도 김 위원장의 제안이었고, 남북 정상회담 역시 김 위원장의 전격적인 제안에 의해 이뤄졌다. ‘김정은의 시간표’라 말할 수 있다. 신년사와 평창올림픽 참가, 남북정상회담, 중국 방문, 북·미 정상회담 등이 모두 북한의 선제적이고 공세적 입장에서 나온 행동이다.”

 

 

보수 세력에서는 이를 두고 “북한에 끌려다닌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우선 보수 세력에게 조언한다면, 이제는 왼쪽 눈을 떠야 한다. 한 눈으로만 남북관계를 보면 안 된다. 북한이 수세적인 입장에서 공세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감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전략목표의 이동이다. 자신감은 신년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핵 무력 완성에 대한 자신감과 내부적인 체제 완성에 대한 자신감이다.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핵무력병진노선의 종료와 함께 경제건설총력집중을 새로운 노선으로 채택했다. 이것은 바로 ‘사회주의 경제 강국’을 목표로 한다는 의미다. 세계 최빈국 상황에서 경제 강국으로 올라선다는 목표 아래 전략적 결단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미 2005년 6월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특사였던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당시 김 위원장은 ‘북·미 관계가 갈등 관계를 벗어난다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북한에 가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복귀를 요구했다. 김 위원장에게 ‘결국 북한의 목표는 핵 보유 아니냐’고 질문하자 김 위원장은 ‘아니다’며 ‘강대국인 미국이 우리를 적대하고 위협하니까 살기 위해 핵무기를 가지는 것이지, 그것이 해소된다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재차 ‘말은 그렇게 해도 남쪽의 보수 세력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자 잠시 숨을 멈추고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오’라고 말했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쳤다. 북한에 있어 건국의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의 말은 (북한의) 헌법이나 노동당의 입장보다도 우위에 있다.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훈이라고 하는데 북한이 따를 수밖에 없다. 김일성 주석의 후대인 김정일 위원장부터 ‘선대의 유훈’이라는 말이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5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구두 친서를 전달했다. 어떤 내용이었고, 당시 북한의 반응은 어땠나.

 

“당시 2차 핵위기였다. 특사 당시 의제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속한 정상회담 개최와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 복귀였다. 당시 두 가지 모두 합의가 됐다. 정상회담을 할 때 장소는 북한 측에 결정을 맡겼다. 시기는 3개월 내에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나에게 귓속말로 ‘곧 좋은 소식을 내려보내겠다’고 했다. 실제 두 달 뒤에 북한의 특사가 내려왔는데 갑자기 ‘제3국에서 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우리 측에서 난색을 표했더니 결국 회담이 확정되지 못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9·19 공동성명을 통해 핵 포기를 선언하면서 경제력 향상을 노렸다. 나중에 파악해 보니 북한이 말한 제3국은 러시아를 의미한 것 같았다. 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다. 북한 역시 핵 포기와 함께 러시아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이후 통일부 장관을 그만두고 당 의장으로 옮겨오면서 당시 좋았던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있다.”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비핵화나 종전선언이 갖는 의미도 상당할 것 같다.

 

“그것보다는 신뢰 구축과 평화체제 정립이라고 보면 된다. 비핵화와 종전의 문제는 화해협력 체제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 내용이다.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총론에 여러 세부사항을 담아낸 것이다. 종전선언은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져야 완성될 수 있다. 남북 간의 군사적 대결상태 종식과 함께 평화선언에 나선 셈이다. 평화선언, 종전선언, 평화협정의 순서로 가게 될 것이다.”

 

 

북한이 정상회담 뒤, 태도가 돌변할 수 있지 않을까.

 

“북한이 늘 문제 삼았던 것은 남한 및 미국의 태도 변화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인사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태도가 돌변할 것이라도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모든 사안을 양파껍질처럼 보는 시각은 적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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