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2003년 평양, “좋은 교훈을 얻었습네다!”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5 11:42
  • 호수 149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이돌 가수 공연 소감에 대한 북측 안내원의 답변

 

2003년 가을,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을 기념하는 남북합동공연 자리에 초대받아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남측 인사’ 1000명은 관광버스를 타고 정전 이후 최초로 비무장지대를 통과한 후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갔다.

 

개성에서 평양까지 가는 동안 높은 산이 길을 막지 않는 한 직선으로 죽 뻗은 도로의 모습, 더불어 주유소나 휴게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도로변 풍경은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개성을 떠나 2시간여 달린 후 관광버스에 함께 탔던 북측 안내원은 “알아서 해결하시라우요” 한마디를 남기곤 차를 세웠다. 다음에 전개된 상황은 상상에 맡기련다.

 

관광버스에 탑승했던 남측 인사들은 각자의 전공을 살려 “여기 도로는 속도를 낼 수 없으니 모조리 다시 깔아야겠다” “상하수도 시설에 전기 설비에 완전히 새로 정비해야 할 텐데…”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상황이 좋았다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십여 대의 관광버스가 줄지어 달리는 걸 보면서 북한 주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야기꽃을 피웠던 기억이 난다.

 

류경체육관 개관 공연 때 사회를 보았던 북측 아나운서는 가수 이선희가 부른 《아름다운 강산》 중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고’라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노라 소감을 밝혔다. 붉은 태양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을 게다.

 

베이비복스가 불렀던 노래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이 입었던 무대의상은 지금도 눈에 선한데, 그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얇은 어깨끈의 제법 야한 의상을 입고 특유의 춤을 선보였던 베이비복스를 바라보던 평양 시민들의 얼굴 표정이었다. 남북합동공연을 주관했던 SBS방송국 카메라가 훑어낸 평양 시민의 표정 속에는 어색함, 당혹스러움, 이질감, 곤혹스러움 등이 가감 없이 담겨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남측 인사 한 분이 “아이돌 가수 공연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북측 안내원에게 물었다. 안내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더니 “좋은 교훈을 얻었습네다”라는 것이 아닌가. “어떤 교훈을 얻으셨는데요?” 다시 물으니 “주체성을 상실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알았습네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현장에 있던 일행으로부터 순간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지만, 왠지 씁쓸했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연 다음 날 일행 중 한 분이 숙소였던 양강도(?) 호텔 지하에 있는 사우나를 들르셨단다. 북한의 사우나는 어떤 모습일까 호기심에 유로화를 내고 들어갔는데 손님은 한 명도 없이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한다. 사우나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옷장 문을 여는 순간 개량 한복이 걸려 있어 그만 웃음이 빵 터졌단다. 그 시기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끝내긴 했지만 여전히 에너지난을 겪고 있던 때라, 호텔 가장 위층에 평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칵테일 바가 있다기에 막상 올라가보니 평양 시내가 암흑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기억도 난다.

 

4월27일 오후 가수 조용필과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함께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만찬에서 공연을 하고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그로부터 어느 새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북합동공연에 북한의 최고지도자 내외가 함께 자리하고 공연 분위기 또한 격세지감을 느끼기 충분할 만큼 봄날의 훈풍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넘실대고 서울역이 국제역으로 부상하리라는 희망의 기운이 고개를 드는 요즈음이다.

 

그럴수록 낙관적 상상과 긍정적 기대 못지않게, 분단 65년 남북관계의 역사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성찰해 보고,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녹록지 않은 상황을 통찰할 수 있는 신중함과 냉철함의 미덕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좋은 교훈을 얻었습네다” 하던 북한 안내원의 속내도 곰곰 생각해 보면서. ​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