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5·18 순직 경찰관들 시신 7일간 길거리 방치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6 09:48
  • 호수 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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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버스 돌진해 4명 사망…우여곡절 끝에 순직 처리

 

1980년 5·18 당시 전남경찰국(국장 안병하 경무관) 산하 함평경찰서 경찰관 4명이 순직했다. 시위대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차량이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면서 발생한 불상사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아 무려 7일간이나 방석복을 입은 상태로 길거리에 방치됐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당시 전남도경에는 시위진압부대인 기동 1·2·3중대가 있었으나 시위가 확산되면서 인력 증원이 불가피했다. 전남도경은 작전 명령을 내려 영암경찰서 등 지역 경찰서별로 50~70여 명의 경찰관을 광주에 동원해 시위 진압에 나서도록 했다.

 

이때 함평경찰서에서도 1개 소대(55명)를 편성해 광주로 파견했다. 각 경찰서 파견부대는 해당 지명을 붙여 ‘○○부대’로 명명했다. 함평부대는 광주 동구 장동 로터리에서 도청 진입 저지 임무를 맡았다. 도청광장과 농협도지부, 장동 로터리와 노동청 일대에 배치됐다.

 

공수부대의 과격 진압은 시민들을 자극했다. 5월20일 오전에는 광주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을 속옷만 입힌 채 심한 기합을 줬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은 하교하던 중학생들까지 자극해 300여 명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다.

 

금남로 1가에서는 공수부대가 경찰 간부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시위대에 적극 대처하지 않는다며 나주경찰서장을 질질 끌고 가기도 했다. 한 전남도경 과장은 공수부대의 과격한 시위 진압에 항의하다 무차별 폭행을 당해 머리가 터지는 일도 있었다.

 

5·18 당시 시위 현장 모습

 

“지휘부와 동료 경찰관들의 과오”

 

오후 7시에는 시위대와 군이 충돌해 20여 명이 사망했다. 오후 9시5분쯤 불상사가 발생했다. 노동청 반대쪽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했다. 버스는 함평부대가 맡고 있던 곳으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경찰관 4명이 차에 깔리거나 치여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망자는 정충길 경장(40), 강정웅 순경(39), 박기웅 순경(40), 이세홍 순경(31)이다. 당시 버스를 운전했던 배용주씨(34)는 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는 “야간 시간대이고 사고 장소 주변에 뿌려진 최루가스로 인해 눈을 뜰 수 없어 사고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사망한 경찰관들의 시신은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다. 지난해 4월 전남경찰청이 펴낸 ‘5·18민주화운동’ 관련 보고서를 통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사고 당일 오후 11시쯤 4구의 시신 중 2구만 전남대병원에 안치된 것으로 나와 있다.

 

보고서에는 안병하 국장 진술조서를 인용해 “시위대의 공격이 강화되면서 나머지 2구의 시신은 거두지 못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사망한 경찰관들의 시신을 모두 수습하지 않았다는 것은 좀 의아하다.

 

또 시위대의 공격이 강화됐다고는 하나 당시 경찰과 시위대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시위대가 경찰에게 반감을 갖고 시신 수습을 막거나 방해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찰이 시위대와 시신 수습과 관련한 어떤 협상을 벌였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전남경찰청은 보고서를 통해 “시신 안치 등 사후 수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지휘부를 비롯한 동료 경찰관들의 과오”라고 밝혔다.

 

5월21일 계엄군이 퇴각하고 경찰이 비상근무에 돌입한 이후에도 시신 수습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찰관들의 증언을 보면 미수습된 경찰관들의 시신은 참혹했다. 전남경찰국 경비계에 근무했던 이아무개씨는 “시신이 상무관과 장비계 사이 노상에 순직 당시와 같이 방석복을 입은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며 “나와 많은 경찰관들이 매우 분노했었다”고 증언했다.

 

시신은 수습된 5월27일까지 무려 7일 동안이나 길거리에 방치됐다. 당시 5월 중순의 날씨인 데다 방석복을 입은 상태여서 시신의 부패가 빠르게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참혹했다고 볼 수 있다.

 

전남대병원에 안치됐던 2구의 시신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고서를 보면 시위대 시신은 태극기를 덮었지만, 경찰관의 시신은 방석복을 입은 상태로 한쪽 구석에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당시 오아무개 광주 서부경찰서 정보관은 “전남대병원에 갔을 때 버스에 깔려 순직한 함평서 직원들의 시신이 한쪽 구석에 방치돼 있어 가슴이 아팠다”고 증언했다.

 

2017년 5월13일 서울현충원 경찰묘역에서 37년 만에 5·18 순직 경찰관들의 추모식이 개최됐다. © 정락인 제공

 

시위대 버스 기사는 특별사면 석방

 

유족들의 분노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아무개 함평경찰서 수사과 직원은 “광주가 회복되고 순직자 시신이 운구돼 각기 초상을 치러 조문을 갔다”면서 “미망인의 싸늘한 눈빛에 서둘러 나온 사실이 있는데, 그들이 순직한 후 몇 년에 걸쳐 가족들도 모두 함평을 떠났다”고 밝혔다.

 

순직자들에 대한 보상과 지원 등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도 의문이다. 순직 동료들을 앞장서서 챙겨야 할 당시 치안본부(현 경찰청)가 문제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순직자들의 순직 처리가 안 돼 전남도경 직원들이 나서 유족들 명의로 치안본부에 진정을 했다. 그런데 답변이 황당했다. “경찰관 신분으로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순직 처리가 안 된다”는 이유로 반려됐다는 것이다.

 

이후 순직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순직이 인정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유족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뤄진 것인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시위대 버스를 운전했던 배용주씨는 살인·소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1981년 3월 열린 항소심에서도 원심을 인용해 사형이 확정됐다. 그러나 배씨는 무기형으로 감형됐다가 특별사면 조치로 1982년 12월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됐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인 1998년 7월 그는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돼 살인 혐의를 벗었다.

 

지난해 5월13일 서울현충원 경찰묘역에서는 시민단체 주최로 37년 만에 순직 경찰관들의 추모식이 열렸다. 올해의 경우 5월14일 같은 장소에서 ‘고 안병하 치안감, 5·18 순직경찰관 추모제’가 개최된다. 시민단체와 대한민국경찰유가족회 등이 주관하고 경찰청 등이 후원한다. 경찰청에서는 민갑룡 차장 등이 참석한다.

 

권옥자 대한민국경찰유가족회 회장은 “고인이 되신 안병하 치안감이나 순직 경찰관들은 모두 경찰의 본분을 지킨 분들이다. 우리는 이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높이 받들고 오래도록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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