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려 ‘주술의 힘’까지도 빌렸던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6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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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6화] 우리의 동학운동, 그리고 미얀마의 ‘가론’

 

지난 4월 서울 종로에 있는 옛 전옥서 자리에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전봉준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곳에서 순국한지 123년 만이다. 이 동상의 뒷면 표석을 살펴보면 같이 처형당한 동지들 가운데 손화중이란 이름이 보인다. 그는 전봉준·김개남과 함께 이 농민운동의 3대 지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녹두장군으로 잘 알려진 전봉준에 비해 손화중은 잘 모르는 이들이 훨씬 많을 터이다.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은 정읍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20대에 동학교도가 되었다. 원래 온화한 성품으로 설득력이 뛰어났던 그는 젊은 나이에 대접주가 될 정도로 명망있는 동학 지도자였다. 재미있는 일은 그가 도술을 부린다는 소문이 나서 유명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창 선운사 뒤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의 배꼽 위에서 비기()를 꺼낸 것으로 알려졌다. 항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이를 꺼내다가 갑자기 비바람과 천둥이 일어 황급히 뚜껑을 닫았다는 일화까지 더해져 당시 ‘손화중 신드롬’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4월24일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에서 열린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에서 박원순 시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침략·학정에 맞서 ‘부적’ ‘주문’으로 무장한 동학군의 처절한 항쟁

 

그 당시에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층의 갖은 수탈로 민심이 흉흉하여 미륵이나 정도령 같은 ‘구원자’의 출현을 고대하는 분위기였다. 이럴 때 손화중이 ‘세상을 바꿀’ 비기를 갖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니 그의 신비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줄을 이었고, 손화중은 동학 세력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여기에다 동학군은 전투를 벌일 때 영적인 기운을 불어넣는 부적을 등에 붙이고 21자로 된 ‘주문(呪文)’을 외우며 진격하곤 했다. 이에 힘을 얻은 탓인지 손화중과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군은 1894년 황토현 전투를 시작으로 관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전주성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진출한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나라의 허약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제국주의 열강들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됐다. 그러자 중국에서는 반외세와 반그리스도교를 부르짖는 의화단(義和團) 운동이 일어나 산둥성과 하베이성의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본래 중국은 주술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비밀결사의 뿌리가 깊은 나라다. 의화단도 백련교의 분파인 의화권이라는 비밀결사에서 비롯됐고, 권법·봉술·도술로 몸을 단련하는 종교단체였다. 이들은 백일 동안 권법을 익히고 주문을 달달 외우면 창과 칼에 찔려도 피가 나지 않으며, 400일 동안 수련을 계속하면 하늘을 나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옥황상제·손오공·저팔계와 같은 토속신앙이나 소설 속 주인공들을 숭배하기도 했다.

 

19세기 마지막 해인 1899년. 20만 명 남짓한 의화단 세력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정부군과 함께 외국 공사관을 습격하고 서양 선교사와 가족, 중국 기독교인 5만 명을 살해했다. 일본과 서구 열강 8개국은 즉각 연합군을 결성하고 ‘주술로 총에 맞선’ 이들을 궤멸시켰다. 

 

이와 같이 동학과 의화단 두 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반외세 항쟁이었고, 또 농민과 종교단체의 연합 항쟁이란 점이 닮았다. 거기에 일부 민간신앙에 바탕한 구세주의적 성격도 함께 지녔다고 여겨진다. 한때 동학에 몸담았던 만해 한용운 선생은 “동학이 큰 힘을 얻은 것은 돈의 힘도, 지식의 힘도, 기타 모든 힘도 아닌 오직 주문의 힘이다”라며 자칫 미신으로 치부하기 쉬운 종교 의식이 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원동력임을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구식 무기를 든 동학군이 일제의 대포와 신식 무기에 조금도 굽힘없이 싸운 것은 함께 ‘주문’을 외치면서 대오를 갖추고 제세안민(濟世安民)의 결의를 다지게 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손화중과 종로1가 영풍문고 앞에 건립된 전봉준의 동상. 오른쪽은 선운사 마애불 모습 (사진제공 = 이원혁)

 

그렇다면 동학이나 의화단과 비슷한 또 다른 농민운동은 없었을까? 필자는 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 등 비교적 민간신앙이 발달한 나라들의 농민운동 자료를 현지에 요청해 받아보았다. 몇몇 자료들 가운데 1930년 영국의 식민지 미얀마에서 일어난 어느 농민운동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띄었다. 흥미롭게도 ‘가론’이란 새의 문신을 새기고 주술을 불어넣은 팔찌를 찬 농민들이 칼과 창만으로 영국군에 대항했다는 것이다. 

 

이 운동을 주도한 세야산(1876~1931)은 의술에 뛰어났고 손금과 천문학에도 밝았다고 한다. 그는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농민들을 치료하는 한편, 천문 지식을 바탕으로 계절과 날씨 변화를 예언했다. 이런 예측들이 적중하면서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923년 민족운동단체인 버마총연합회에 가입한 세야산은 본격적으로 반영(反英)투쟁을 펼쳤다. 그러나 과도한 인두세와 토지세 징수, ‘불린자부’라는 영국계 쌀 조합의 횡포, 영국이 지원한 사채업체 ‘치따’의 폭리 등 170건이 넘는 피해사례를 수집해 보고했지만, 식민당국이나 친영(親英) 세력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곤 했다. 이에 분노한 세야산은 1930년 1월 영국의 착취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무장 세력을 결성했다.

 

항전을 앞두고 세야산은 왕이 되기 위한 의식을 45일간 치렀다. 그는 바나나 잎으로 만든 의복을 입고 일주일 동안 금식을 하며 ‘가론’의 천명을 받았다.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가론은 용도 제압할 수 있다는 거대하고 용맹한 새였다. 세야산은 이 새가 영국군으로 상징되는 용을 잡아먹는 모습을 군기(軍旗)로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무기였다. 고작 칼·죽창·새총이 무기의 전부였다. 세야산은 “죽으면 땅이 되고 살면 왕이 된다”라며 어차피 과도한 세금 때문에 죽는 건 마찬가지라고 농민들을 독려했다.

 

흔히 ‘질게 뻔한’ 싸움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 용기는 주술의 힘을 빌렸다. 세야산은 허벅지에 가론 문양을 새기면 용맹한 전사가 된다고 주장했다. 또 구리로 만든 팔찌에 주술을 불어넣어 이걸 차면 총알이 빗겨가고 만약 맞는다 해도 몸을 뚫지 못한다고도 했다. 마침내 현대식 무기를 앞세운 영국군과 ‘주술로 무장한’ 가론군이 맞붙었다. 이런 주술이 통했는지 파쉐이저 전투 등 몇 차례 싸움에서 가론군이 승리를 거뒀다. 깜짝 놀란 영국군은 또 다른 식민지인 인도에서 1만 명의 지원군을 불러왔다. 결국 알란 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가론군이 패배하여 세야산을 비롯한 주도 세력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오른쪽은 중국 의화단원의 수련 모습. 가운데 미얀마 농민운동 지도자 세야산과 왼쪽이 가론군 깃발 (사진 제공 = 이원혁)

 

영국 착취에 ‘분노한 에너지’를 항쟁의 역사로 바꾸어 놓은 ‘주술’의 세계

 

2년에 걸친 무력항쟁 동안 농민 2000명이 전사했으며, 체포된 1만여 명 중 302명이 처형됐고 890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세야산도 1931년 8월에 붙잡혀 그해 11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재판을 맡은 영국인 모리스 콜리스 판사는 훗날 《미얀마 재판이야기》라는 책에서 세야산 농민운동의 원인으로 영국이 ‘자국 이익만 챙겼다’란 것과 ‘미얀마 사람들을 인간이 아닌 동물로 대했다’란 점을 들었다. 또 처형 직전 세야산이 미소를 지으며 “다음 생에는 반드시 영국을 이기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라고 한 말을 거론하며 식민통치의 폐악을 조목조목 짚었다.

 

세야산의 죽음 1년 뒤, 영국은 미얀마의 자치를 승인했다. 어찌보면 침략과 수탈로 인한 ‘흔들리는 민심’에 파고든 주술과 미신은 농민들의 ‘분노 에너지’를 항쟁의 역사로 승화시킨 셈이다. 때론 이성적인 판단이나 행동보다 맹목적인 믿음이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모양이다.

 

세야산이 주술을 무기로 영국군에 맞선 1931년, 묘하게도 같은 해 조선에서는 미신타파와 문맹퇴치를 위한 ‘브나로드’라는 농촌계몽운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아는 것이 힘이다’란 구호를 내세운 이 운동도 일제의 탄압으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과연 시대를 변화시키는 것은 ‘주술의 힘’일까, 아니면 ‘아는 것이 힘’인 걸까? 지금 우리가 옳다고 믿는 사실이 당시에도 옳았을까? 어쩌면 역사 공부는 ‘정답’이 없어서 재미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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