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고민 “중국 개혁·개방 본보기로 삼아야”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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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 ‘김정은 전문가’ 꼽히는 정성장 세종연구소 실장이 분석하는 인간 김정은

“조·미(북·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5월16일 미국의 핵폐기 계획에 불만을 표출하며 북·미 정상회담 무산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나서자, ‘김정은을 믿을 수 있느냐’가 또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놓고 ‘호전적이고 예측 불가한 본색을 드러냈다’ ‘아버지(김정일)·할아버지(김일성)와 똑같다’는 등의 분석을 쏟아냈다.


미 백악관은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라며 애써 침착한 모습이었으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김 위원장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전히 김 위원장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국내 수많은 북한 전문가들 중 ‘김정은 인물분석’의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김 위원장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와 자극부터 걷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위스 유학파인 김 위원장은 선대(先代)와 분명히 다르고 이미 국제사회에 출사표를 던졌다”고 정 실장은 단언했다. “왜곡된 인식·과소평가에서 벗어나 ‘현재’의 김정은을 직시해야 세계사적 기회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27일 모든 남북 정상회담 일정을 마친 후 차에 올라타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미숙하고 포악한 지도자’ 한정해선 안 돼”


정성장 실장은 5월16일 북한 관련 현황 파악 차 러시아 극동지방을 답사하던 중 시사저널과의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이날 북한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명의로 발표한 담화문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조·미 관계 개선을 위한 진정성을 가지고 조·미 수뇌회담에 나오는 경우 우리의 응당한 호응을 받게 되겠지만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 가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다가오는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북한 핵무기를 폐기해 미국으로 옮기고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까지 제거하겠다고 말한 데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담화문에서 북한은 미국 측이 주장하는 리비아식 ‘선(先) 핵 폐기·후(後) 보상’ 해법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등을 받아들일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미국 등 국제사회의 시선으로 볼 때 ‘알 듯 말 듯 했던’ 김 위원장은 다시 조금 멀어지는 듯하다. 이에 대해 정성장 실장은 “스탈린주의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최고지도자의 이념·정책적 성향 등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며 “북한 지도자 김정은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해는 계속해서 상당히 많은 문제를 내포해왔다”고 밝혔다. ‘미숙하고 포악하기만 한 지도자’라는 편향된 인식 틀을 지금 김 위원장에게 적용하면 안 맞는다는 것이다. 정 실장은 “김정은식 공포 정치에 관해 팩트와 다른 보도·주장이 난무하면서 김 위원장에 대한 오해를 키운 측면도 있다”며 “물론 김 위원장이 비난받을 부분이 없는 게 아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 김 위원장을 논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미국 정가와 학계 인사 상당수는 김 위원장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좀처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특히 볼턴 보좌관은 북한 담화문이 나온 뒤에도 “과거 정부들이 했던 실수들을 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이 점점 더 많은 보상 혜택을 요구하는 동안 북한과 끝없는 대화에 빠져들지 않겠다”고 응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최대한 말을 아끼며 ‘대(對) 김정은 전략’에 고심하고 있다. 협상의 달인으로 통하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도 김 위원장의 수를 읽기란 쉽지 않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저런 의견을 다 청취하느라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다. 그는 지난해 김 위원장을 ‘리틀 로켓맨’이라 조롱하다가 이번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훌륭한(honorable)’ ‘정중한(gracious)’ 등의 표현으로 칭찬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북한에서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고 돌아온 뒤부터다. 폼페이오 장관은 ‘매파(대북 강경파)’로 분류됨에도 김 위원장과 대화가 잘 통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북·미 밀월이 익숙지 않은 볼턴 보좌관 등 미국 내 슈퍼 매파들은 비관적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북한을 압박했다. 정 실장은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지 못했거나 부정적인 인식을 고수하는 정치인·전문가 등은 왜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하고 미국과도 대화하려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과 후지모토 겐지가 2013년 4월 23일 일본 도쿄의 고단샤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정성장

 

 

 

정 실장, 후지모토 겐지와 두 차례 만나 


그렇다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을 신뢰할 수 있을까. 김 위원장은 어떤 성향의 인물이며, 어떻게 성장해 왔을까. 베일에 싸인 평양 주석궁 내부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이방인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다. 그는 1982년 처음 북한에서 요리사로 일한 이후 198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속요리사로 발탁돼 2001년까지 주석궁에서 김정일·김정은 등 일가와 함께 생활했다. 이후 김정은이 정권을 잡은 2012년 다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난 후지모토는 2016년에도 김 위원장의 초대로 다시 평양을 방문해 그와 면담하는 등 김정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로 통한다. 일본과 국내 언론에서 후지모토와의 접촉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는 평양을 의식한 듯 언론과의 인터뷰에 거의 나서지 않는다. 정 실장은 ‘김정은 연구’를 위한 학자의 입장에서 후지모토와 2008년과 2013년 등에 걸쳐 만나 대화를 나눴다.


정 실장은 본인의 연구 자료, 후지모토의 관련 증언 등을 토대로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를 통한 개혁·개방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지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데, 김 위원장은 세계관이 형성되는 청소년기 약 4년 반(1996년 여름~2001년 1월) 동안 스위스에서 유학했다. 스위스 유학 도중 프랑스·일본 등도 찾으며 선진자본주의 시스템을 눈으로 직접 봤다”며 “김 위원장이 추구하는 목표는 단순히 정권을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발전된,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북한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혁·개방에 대해 부정적이다 못해 적대적이었던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과 확실히 구분되는 측면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서방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다. 김정은 위원장의 롤 모델 격인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은 프랑스 유학과 장기 체류를 통해 자본주의를 직접 경험한 뒤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돼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한 바 있다.

 

 

“김정은, 어린 시절부터 개혁·개방 열망”


정성장 실장은 과거 김정은 위원장이 후지모토 겐지에게 했던 말을 소개했다. 김 위원장은 스위스에 간 지 2년이 지난 1998년 6월 후지모토에게 “외국의 백화점이나 상점을 보니 어디를 가나 물자와 식품들로 넘쳐나 놀랐다”면서 “우리나라(북한) 상점은 어떨까”라고 물었다. 2000년 8월에는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비해 공업기술이 한참 뒤떨어진다”며 “초대소에서도 자주 정전이 되고 전력 부족이 심각해 보인다”고 했다. 이어 3개월 전에 있었던 아버지 김정일의 방중을 상기하면서 중국의 경제 성장세를 극찬했다. 김 위원장은 “지금 중국은 여러 면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공업이나 상업, 호텔, 농업 등 모든 것이 잘 나간다”며 “중국은 1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가졌는데도 통제가 된다는 게 대단하다”고 후지모토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덧붙였다. 후지모토는 “당시 김 위원장이 북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중국의 방식을 본보기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밤새워 토로할 만큼 열정적이었다고 후지모토는 밝혔다. 정 실장은 “김 위원장은 청소년 때부터 북한이 왜 이렇게 낙후돼 있는지에 대해 절절히 고민해온 것”이라며 “비핵화로 대북 제재가 해제되면 그토록 갈망하는 개혁·개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일각에선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이 김정은 위원장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 위원장이 ‘핵·경제 병진’에 실패하고 대북 제재까지 받으면서 사실상 ‘백기 투항’ 했다는 것이다. 정성장 실장은 “제재가 중요한 요인 중 하나임엔 틀림없다”면서도 “마치 그게 유일한 원인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왜곡”이라고 지적했다. 북한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는 분석에 대해서도 정 실장은 “김 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 경제가 중속 성장을 이뤄왔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한반도 대화 국면은 김 위원장의 열망과 문재인 정부 제안이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는 게 정확하다고 정 실장은 설명했다.  

 

정 실장은 “남한이 북한과의 화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북한에 북·미 수교,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국제사회 제재 해제 등을 제안했다”며 “핵 포기 시 핵을 보유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해주겠다는 설득을 김 위원장이 받아들이게 됐다”고 밝혔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김 위원장이 결코 완전한 비핵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김 위원장은 4월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핵무기가 ‘강력한 보검’이자 ‘확고한 담보’라고 말했다”면서 “이것을 내려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 실장은 태 전 공사 발언이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다고 일축했다. 그는 “김 위원장이 핵을 유지할 생각이라면 미국과 대화할 이유가 전혀 없고, 남북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화의 판을 짠 우리 정부는 한반도 위기 속 중재자 역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청와대는 5월17일 한·미와 남북 간에 여러 채널로 긴밀히 입장을 조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 측에 김 위원장의 특성과 의중을 십분 설명하는 게 핵심이다. 정성장 실장은 “북한이 아직 핵을 포기한 건 아니라도 그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라며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닦달만 할 것이 아니라, 북한의 전향적 행보에 상응해 한 발짝씩 보조를 맞춰 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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