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라오지를 국민 브랜드로 키워낸 '자둬바오'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20 19:24
  • 호수 149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 음료시장에서 2008년 코카콜라 앞선 이후 불패신화 이어가

 

지난해 기업 브랜드 가치 세계 5위를 기록하며 1초당 4만 병이 지구에서 소비되는 코카콜라를 누르고 중국 음료시장에서 10년 연속 1위를 달리는 량차(凉茶) 브랜드가 있다. 1828년부터 중국 광둥(廣東) 지방에서 만들어진 왕라오지(王老吉)는 중국 역사상 최대 상표 분쟁으로 자둬바오(加多寶)로 브랜드 이름을 바꾸는 진통을 겪었지만, 전 세계 부동의 1위 코카콜라를 2008년 앞선 이후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불패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량차는 덥고 습한 광둥 일대에서 해열과 해독을 위해 마시는 대용차(代用茶)다. 만드는 사람마다 고유한 비법이 있지만 해열에 뛰어난 약재를 혼합해 끓이는 공통점이 있다. 량차는 끓인 차를 식혀 시원한 상태에서 마시는 차가 아닌 몸의 열을 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표적 량차 왕라오지는 1828년 왕쩌방(王澤邦)이 창업한 브랜드다. 왕라오지는 몸의 열을 식혀주는 약효가 뛰어난 차였지만 광둥성을 넘어 전국에 알려진 것은 홍콩 자본이 투입된 이후다.

 

왕라오지는 190년을 이어온 장수기업이지만 전국 유명 브랜드로 올라선 시점은 불과 16년 전부터다. 대를 이어 광둥성에서 점포를 늘려가던 왕라오지는 왕쩌방의 손자가 1870년 홍콩에 량차 전문점을 열면서 국제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49년 신중국이 대륙에 들어서며 광저우의 왕라오지는 국유화된 후 광야오집단(廣藥集團)에 귀속됐다. 홍콩의 왕라오지는 왕쩌방의 5대손인 왕젠이(王建儀)가 운영하며, 30여 국가에 왕라오지 상표를 등록했다. 중국과 홍콩이라는 이질적인 정치체제 속에서 왕라오지의 소유권자는 둘이 됐다.

 

© pixabay

 

왕라오지, 10년 연속 중국 음료시장 1위

 

홍콩의 왕라오지와 의기투합한 홍콩 훙다오집단(鴻道集團)의 천훙다오(陳鴻道)는 왕라오지의 세계화를 위한 자회사 자둬바오(加多寶)를 설립했다. 자둬바오는 중국 진출을 위해 중국 국내 상표 소유권자인 국영기업 광야오집단과 1995년부터 15년 동안 ‘왕라오지’ 상표를 독점 사용하기로 계약했다. 자둬바오는 6년 동안 대규모 투자를 했지만 판매실적은 크게 호전되지 않고 1억 위안에 머물렀다. 자둬바오는 좋은 약은 입에 써야 한다는 중국인의 상식에 비해 맛이 단 왕라오지가 약과 차 사이에서 정체성이 모호한 사실이 판매부진의 가장 큰 이유라고 파악했다. 자둬바오는 치료를 위해 마시는 약이 아닌 평소에 매운 음식을 먹거나 기름진 야식을 먹을 때 몸에 열이 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는 기능성 음료로 부각시키는 것이 왕로오지의 활로임을 깨달았다.

 

펩시의 게토레이 판매 전략을 벤치마킹한 자둬바오는 ‘열 나기 전에 왕라오지를 마시자’는 명확한 기능성 음료 개념을 가진 광고 문구를 2002년 만들어 처음 사용했다. 정체성을 찾은 왕라오지는 2002년 매출액 1억8000만 위안으로 전년도 대비 80%의 신장률을 보였다. 왕라오지 탄생 174년 만에 최고 매출을 올렸다. 2003년 광저우에서 처음 발생한 사스가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몸의 열을 내려준다는 소문과 함께 왕라오지는 광저우를 넘어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2003년 6억 위안의 매출로 뛰어오른 왕라오지는 2004년에는 14억3000만 위안을 기록했다. 세계적인 음료 강자들과 맞대결을 피하고 새로운 틈새 판매채널을 확보한 자둬바오의 판매전략 덕분에 왕라오지의 매출은 2007년에는 50억 위안을 기록하며 코카콜라를 바싹 추격하게 됐다.

 

2008년 자둬바오의 왕라오지가 코카콜라에 완승하게 된 일등공신은 중국의 네티즌이다. 2008년 5월 쓰촨(四川)성 원촨(汶川)에서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만 6만9000명이 넘었다. 당시 중국의 한 방송사가 주최한 ‘사랑의 공헌-2008 대지진 모금 연회’ 생방송에 나온 자둬바오는 1억 위안을 기부했다. 광둥 지방의 지역 음료회사에 불과한 자둬바오가 중국에 진출한 세계적인 기업들을 전부 제치고 최고의 지원금을 쾌척한 것이다. 이후 온라인상에서는 ‘왕라오지를 보이는 대로 모두 마셔버리자’라는 글이 쇄도했다. 코카콜라 브랜드 가치의 800분의 1에 불과한 왕라오지는 단일품목으로만 그해 여름 100억 위안을 돌파하며 코카콜라를 2위로 밀어냈다.

 

자둬바오는 2008년 중국 내 코카콜라 판매량의 2배가 넘는 600만톤의 왕라오지를 생산·판매하며 코카콜라를 따돌리고 중국 음료시장의 최강자로 등극했다. 지방 브랜드에 불과했던 왕라오지가 코카콜라를 넘어 중국 1위의 음료로 성장한 계기와 동력은 중국 내 상표 소유권자인 광야오집단이 아닌 홍콩 자본 자둬바오의 공로였다. 왕라오지는 ‘중국 소비자 만족도 1위’ 음료로 떠오르며 인민대회당 연회 전용 차로 선정됐다.

 

© 서영수 제공


 

2008년 쓰촨성 대지진 계기로 코카콜라 역전

 

왕라오지를 중국의 국민음료로 키운 자둬바오는 중국 내 상표소유권자인 광야오집단이 “자둬바오와 더 이상 합작하지 않고 독자 생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불화와 소송에 휩싸였다. 국유자산 유실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운 광야오집단은 2011년 4월 중국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CIETAC)에 중재를 신청했다. 2012년 5월 중국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는 훙다오그룹이 더 이상 왕라오지 상표를 사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기업의 제일 큰 자산은 브랜드임을 잘 아는 자둬바오는 국유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할 수 없음을 감지하고 국민 브랜드 왕라오지에서 신생 브랜드 자둬바오로의 브랜드 변신이 진짜 승부처라고 판단했다. 자둬바오를 브랜드로 각인시킬 시간이 필요했던 자둬바오는 베이징시 제1중급인민법원에 중재판정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하며 ‘왕라오지’를 상표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상표분쟁을 시작으로 제조비법을 둘러싼 광고 카피 분쟁에서도 자둬바오는 패소했다. 아직도 디자인 특허, 허위·과장광고 등 10여 건에 달하는 소송이 현재진행형이다. 2014년 12월 광둥성고급인민법원은 자둬바오가 디자인해 만들고 국민 브랜드로 성장시킨 상징 ‘빨간 캔’마저 사용불가 판정을 내렸다. 모든 소송에서 자둬바오는 수세에 몰렸지만 판매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 힘의 원동력은 중국 소비자 대다수가 광야오집단이 국유기업이란 후광을 업고 왕라오지를 국민 브랜드로 키운 자둬바오가 일궈낸 성공을 법의 이름으로 강탈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최고인민법원은 광둥성고급인민법원의 판결을 뒤집지는 않았지만 원심판결을 정정해 자둬바오에도 ‘빨간 캔’ 사용을 허가했다. 작은 변화지만 자둬바오의 실질적 승리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