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강경대응 자제…정상회담 불씨 되살아날까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8.05.2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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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계관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기회줄 용의”

 

정상회담 전 으레 거치는 단순한 기 싸움이 아니었던 걸까. 우리 시간으로 5월24일 늦은 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는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현 시점에선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며 돌연 회담을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벌어진 터라 남북은 물론 국제사회에 더 큰 충격을 안겼다.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는 트럼프 서한이 공개된 지 8시간여가 흐른 25일 오전, 북한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통해 첫 입장을 밝혔다. 김 제1부상은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면서 미국에 다시 정상회담 개최의 공을 돌렸다. 인질 석방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등을 실행한 후 이뤄진 일방적 통보에 북한의 거센 반발이 예상됐지만, 다소 차분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처럼 양측이 닫아두지 않고 서로의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예정대로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발표로 국제사회가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북·미 양측이 서로의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예정대로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北 최선희 발언이 결정적 배경으로 지목돼

 

트럼프는 이날 백악관을 통해 공개한 서한의 내용은 정상회담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들인 북한의 시간과 노력에 대한 감사로 시작됐다. 그러나 요지는 북·​미 정상회담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슬프게도, 최근 당신 측에서 보인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에 근거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이번 회담이 지금은 부적절한 시기라고 느낀다”며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만약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꾼다면, 주저 말고 연락하거나 편지를 보내 달라”며 북한에 여지를 남겨둔 듯한 말로 서한을 맺었다.

 

한밤 중 갑작스런 회담 취소에 청와대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 긴급회의 소집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즉각 “당혹스럽고 매우 유감”이라며 “정상 간의 보다 직접적이고 긴밀한 대화로 해결해 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북·​미 정상회담에 성사 가능성에 ‘99.9%’라며 자신감을 내비쳐왔던 터라 미국의 이 같은 판단을 사전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전격적으로 이 같은 결정을 한 배경엔 같은 날 발표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담화문이 ‘트리거(방아쇠)’였던 것으로 지목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백악관 관계자는 “펜스 부통령을 향한 북한의 반응이 ‘인내의 한계’였으며, 곧 정상회담을 취소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가 서한에 언급한 ‘공개적 적대감’ 역시 이 지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선희 부상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보도된 담화에서 “미국이 우리의 선의를 모독하고 계속 불법무도하게 나오는 경우 나는 조·​미(북·​미) 수뇌회담을 재고려하는 데 대한 문제를 최고지도부에 제기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 ‘무지몽매하다’ 등으로 표현한 것이 트럼프를 비롯한 미국 지도부를 불편하게 한 것으로 지목된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향해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 ‘무지몽매하다’ 등으로 표현한 것이 트럼프를 비롯한 미국 지도부들을 불편하게 한 결정적 배경으로 지목된다. ⓒ사진=연합뉴스

 

최 부상의 원색적 비난은 펜스 부통령이 지난 21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김정은이 합의를 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안은 ‘리비아 모델’이 끝난 것처럼 끝나고 말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리비아 모델은 리비아의 국가원수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한 후 정권 붕괴를 경험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며 끝이 났다. 그 때문에 북한에선 꾸준히 ‘리비아 모델만은 안 된다’는 주장을 고수해왔다.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서한은 갑작스러웠지만, 사실 최선희 부상의 발언이 나오기 전부터 북·​미 간 이상 기류는 조금씩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지난 16일 북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의 북핵 해결 방식에 공식적으로 반발하면서 북·​미 간 충돌은 시작됐다. 미국이 일방적인 핵 포기만 강요하려고 하면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려하겠다고 발표해 더욱 긴장감을 높였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다수의 국제사회와 국내외 한반도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진행될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한때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현장에 우리 측 기자단이 들어가지 못하면서 한차례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기는 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다시 방북을 승인하고 예정대로 핵실험장 폐쇄를 진행하면서 북·​미 정상회담도 다시금 순항로를 타는 듯 했다. 

 

그러나 지난 22일부터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 동안 나왔던 트럼프의 발언에서 북·​미 정상회담 연기를 시사하는 듯한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회담이 열릴지 안 열릴지 두고 보자”, “북·​미 회담이 열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나중에 열리게 될 것이다”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외신들은 정상회담이 6월 안에 열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레 보도했다. 그러던 중 북한 최선희 부상의 발언까지 더해지면서, 미국이 정상회담 취소 발표에 대한 의지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22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인 오벌오피스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취재진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엔 “정상회담 취소에 깊은 우려”

 

트럼프의 서한이 발표된 직후 국내 정치권은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유감과 당혹감을 드러내는 입장을 쏟아냈다. 외신들도 뉴스를 특별 편성해 속보로 관련 내용을 전달했다. 미국 언론은 북·​미 관계가 지난 몇 주 간 삐걱거렸지만 전격 무산된 건 놀라운 일이라고 보도했다. 중국 언론 역시 트럼프의 발표에 놀라움을 표하면서도 ‘아직 재개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유엔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지난 2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군축회의에서 “싱가포르 회담이 취소됐다는 데 깊은 우려를 갖고 있다”며 “평화적이고 검증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관련 당사국들이 대화를 이어갈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정치권은 입장 표명에 다소 신중한 모양을 취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식 논평을 자제하며 변화 가능성이 농후한 사태를 조금 더 관망, 주시하겠다고 밝혔다. 자유한국당은 25일 새벽 장제원 수석대변인의 이름으로 논평을 내고 “북한에 아직도 완전한 핵폐기 의사가 없다고 판단한 트럼프 대통령이 미·​북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어설픈 평화중재자 역할이 한반도 평화에 큰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바른미래당 역시 회담 취소 원인을 ‘북한의 태도 돌변’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이제라도 문재인정부는 보다 냉철한 대북접근이 필요하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길 바란다”고 논평했다.

 

민주평화당은 “상당히 당황스럽다”면서도 “트럼프가 ‘지금은 부적절하다’고 한 걸 보면, 여지를 남겨놓은 발언으로 보인다”며 신중한 입장을 내놓았다. 정의당은 “전세계가 지켜보며 기대해온 정상회담을 이같이 일방적인 방식으로 취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미국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청와대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고 있지만, 대리인들 간에 주고받는 말이 아닌 ‘정상 간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과의 조속한 핫라인 연결이 필요하다는 안팎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만큼, 청와대에서도 이내 남북 정상 간의 직접 통화를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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