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을 보면 트럼프가 보인다
  • 손기웅 한국DMZ학회장·前 통일연구원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01 16:13
  • 호수 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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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전망대] 안보·경제 정책 판박이…‘미국 우선주의’로 한·미 관계 갈등

한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에 놓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이미 합의된 것을 뒤엎거나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상황이다. 이를 단순히 자국 우선주의나 자국제일주의라고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더구나 세계 최대 강대국인 미국이 당사자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일상적 정치인과 다른 모습을 보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 과정 그리고 집권 후 펼치고 있는 정책의 기반이다. 사실 일방적 미국주의는 새삼스런 게 아니다. 지난 세기 닉슨 행정부가 그 원형이다. 리차드 닉슨 대통령은 1972년 중국과 소련을 각각 방문, 냉전에서 긴장완화의 데탕트로 전환시킨 세계적 정치인이다. 그는 1969년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과 1971년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으로 세기적 사태를 만들어 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절대적으로 우월했던 국력을 바탕으로 서구체제에서 정치·군사 및 경제적 패권을 장악했다.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원리는 봉쇄정책이다. 그러다보니 여러 곳에서 잡음이 났다. 그 예가 베트남전쟁이다. 본질적으로민족해방전쟁의 내란이었던 동 전쟁에 대규모 개입한 미국은 봉쇄의지를 확고히 함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 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됨으로써 승리를 가늠할 수 없는 늪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닉슨은 1969년 7월25일 미국령 괌에서 ‘대(對) 아시아 정책’을 발표한다. 이른바 닉슨 독트린의 윤곽이 드러난 것이다. 개입주의에서 제한적 개입으로 변화된 닉슨 독트린의 핵심은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하며 강대국에 의한 핵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곤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아시아 각국은 스스로 개별적으로 혹은 협력해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1972년 2월21일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닉슨, 긴장완화 이끈 세기의 정치인

 

문제는 그것이 관계국, 더 나아가 군사동맹국에게 일방적으로 통보됐다는 사실이다. 1968년은 남북관계에 굵직한 사건이 많은 해였다. 미국의 요청에 의해 해병 청룡부대, 육군 맹호부대와 백마부대 등 약 5만 명의 최정예 병력을 빼내어 베트남에서 전투하고 있던 우리에게 미국의 제한적·선택적 개입과 감군 계획(주한 미군 1개 사단 철수)은 엄청난 충격을 줬다. 

 

닉슨 독트린에 의한 군사비 지출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누적된 미국의 국제경쟁력 약화와 고평가된 달러에 대한 투기 등으로 미국의 국제수지는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상승되는 ‘이상 현상’이 발생, 경제가 전면적으로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보호적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신보호주의(New Protectionism)가 대두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1971년 8월5일 닉슨 행정부는 30년대 뉴딜(New Deal) 정책 이후 최대의 경제정책 전환이라 불리는 신경제정책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주요 내용은 달러의 금으로의 태환성 정지와 수입상품에 대한 10% 과징금 징수다. 이 조치는 고정환율과 금환본위제를 통해 환율의 안정, 자유무역과 경제성장의 확대를 목적으로 1944년 미국에서 체결된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을 의미한 것이었다. 또한 수입과징금이라는 무역장벽을 설치한 것은 관세장벽과 수출·입 제한을 제거하고 국제무역과 물자교류를 증진시키기 위해 1947년 미국을 비롯한 23​개국이 조인한 국제무역협정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정신을 위반한 것이었다.

 

신경제정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창한 국제 경제 질서를 미국 스스로 일방적으로 파괴해 버린 것이었다. 대신 미국은 주요국의 일방적 양보를 요구하는 공격적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미국 내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은 내려갔고 수지는 개선됐다.

 

닉슨의 정책은 철저히 자국 이익을 추구했던 민족주의의 산물이었다. 공통적인 방법은 일방적인 선포다. 이를 통해 미국은 경제적으론 이득을 취할 수 있었지만 손실도 컸다. 당장 동맹국과 우호국들의 미국에 대한 신뢰감이 약화됐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보다 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무역불균형 해소, 무역장벽 철폐, 수출기회 증대 등의 경제문제를 국가안보전략에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국가안보전략의 네 가지 주요 축 가운데 세 가지가 △미국의 국민, 본토, 그리고 삶의 방식의 보호 △미국의 번영 촉진 △미국의 영향력 확대다.

 

역대 어느 미국의 행정부보다 북핵의 CVID(불가역적 비핵화)한 폐기에 적극적인 트럼프 행정부다.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따른 대응이라 하더라도 북핵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우리의 입장에선 고무적이고 북·미 정상회담에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일방적 미국주의, 안보가 경제이고 경제가 안보인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폐기과정에서 우리에게 내밀 청구서가 어떠할지 벌써부터 걱정스럽다. 닉슨 행정부의 일방적 미국주의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과 독재체제 강화로 대응했다. 결국 한미는 갈등을 빚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서독처럼 실용적 노선으로 남북문제 해결

 

반면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서독의 선택은 달랐다. 역시 대(對) 소련, 대 공산권 최전방 군사기지 역할을 담당하면서 철저한 서방통합정책(Westintegrationspolitik)으로 미국을 따랐던 서독은 미국이 자국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소련과 손잡은 상황에서도 미국의 세계정책을 거스르지 않았다. 미국이 소련과 화해하는 데탕트를 오히려 활용, 베를린 봉쇄사건으로 불안했던 서베를린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동구권과 관계를 개선하고 동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실익을 추구하는 전통적 서독 정치에 바탕을 둔 빌리 브란트 수상의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이 전개된 것이다.

 

북핵 폐기,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공존, 한반도 전역에 자유·민주·인권·복지의 실현, 북·미 관계 정상화와 한·중 및 한·러 관계 강화 등과 같이 트럼프의 일방적 미국주의 내에서도 우리가 미국과 함께 이끌어내고 실현시킬 수 있는 국가이익과 가치는 다양하다. 트럼프 정부에 편승해 안보와 경제를 동시에 이끌어내는 우리만의 실용정치(Realpolitik)가 절실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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