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 “넘치게 받은 사랑 돌려드리고 싶어 재능 기부”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08 14:57
  • 호수 1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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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生生토크] 라오스의 ‘야구 전도사’로 맹활약 중인 프로야구 원년 스타 이만수 이사장

 

이만수 라오스야구협회 부회장(60)의 현역 시절 별명은 ‘헐크’였다. 지도자 생활에서 물러난 후의 행보도 ‘헐크’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가 설립한 재단 이름도 ‘헐크 파운데이션’. 재단 이사장으로도 활약 중이다. 그런 이 이사장한테 최근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프로 재능 기부러’이다. 야구를 활용한 재능 기부와 자원봉사의 삶이 2014년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야구단을 창단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라오J브러더스 야구단이 라오스 대표팀으로 성장해 오는 8월 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두고 있다. 

 

이 이사장을 만난 곳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드림파크 야구장. 얼마 전 3주간의 일정으로 라오스 대표팀이 한국을 방문한 터라 이 이사장은 선수단과 함께 미니 캠프를 차려 아시안게임에 대비한 훈련을 이끌고 있었다. 라오스 대표팀의 한국 전지훈련은 경기도 화성시의 지원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성시뿐만 아니라 라오스 대표팀을 돕는 수많은 손길 덕분에 40여 명의 남녀 선수들은 한국에서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이사장은 도움의 손길들을 향해 고마움을 전하며 아이들이 한국에서 ‘6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6월5일 오후 라오스 국가대표 야구단을 창단한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이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했다. ⓒ시사저널 임준선


 

왜 라오스였나요? 다른 나라도 있었을 텐데 왜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하려 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SK 감독으로 있을 때부터 라오스에서 사업하시던 제인내씨가 계속 연락을 해 왔었어요. 라오스에 야구가 없는데 시간 될 때 재능 기부를 하러 와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처음엔 다소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건성으로 대응했는데 이후에도 제인내씨가 계속 연락을 해 오더라고요. 꼭 한 번만 와 달라면서요. 처음에는 1000만원어치의 야구용품을 먼저 보냈어요. 팀 매니저를 통해 선수단의 낡은 유니폼을 수거해 보내주기도 했고요. 2014 시즌 후 SK와 재계약되지 않으면서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여유롭게 아내와 여행이나 다니려던 계획이 라오스 재능 기부로 연결된 것입니다.”

 

처음 라오스를 방문했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4년 전만 해도 야구공을 발로 찼던 아이들이에요. 라오스에서는 축구가 제일 인기 있는 종목이고 야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야구’란 단어가 없었거든요. 팀을 꾸리기 위해 선수들을 모집했는데 야구 룰을 모르니까 설명하기가 정말 어렵더라고요. 투수, 타자, 수비수가 뭘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 희생타, 희생 번트를 설명하는 거였어요. 자신이 죽는데 왜 주자가 한 베이스씩 더 가느냐고 묻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가 안 간다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죠.”

 

6월5일 라오스 국가대표 야구단을 창단한 이만수 이사장이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마친 후 단체사진을 찍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공산국가에서 자란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이방인을 잔뜩 경계했다고 한다. 야구 연습할 생각은 안 하고 장난만 치면서 좀처럼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다. 당시 이 이사장은 굳게 닫힌 아이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게 시급하다는 걸 깨달았다. 라오스 도착 3일째부터 이 이사장은 아이들을 안아주고, 하이파이브를 해 주면서 파이팅을 외쳤다. 이 이사장 특유의 긍정의 힘이 라오스 아이들에게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은 가능하지만 재능 기부를 계속 이어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들었어요. 

 

“처음 라오스에 갔을 때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이라고 답하는 녀석도 있었어요. 궁핍하게 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그 꿈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정치인을 희망하는 아이도 있었고 교수, 의사를 꿈꾸는 아이도 나타났습니다. 야구를 하면서 꿈이 생기게 된 것이죠. 어떤 아이는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룬 셈이죠.”

 

라오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어요. 야구 불모지의 나라에 야구를 전파하고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은 셈이네요.

 

“그 훈장은 굉장히 의미가 컸습니다. 라오스에 가서 2년 동안은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안 만나줬어요. 제가 하는 재능 기부를 일시적인 이벤트로 치부했던 것이죠. 그러다 꾸준히 라오스를 방문하고 야구 용품을 지원하면서 아이들을 ‘야구 선수’로 성장시키는 과정을 예의 주시했다고 하더라고요. 2016년 8월에 라오스 아이들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어요. 이번이 두 번째였고요. 첫 방문 후 아이들이 한국을 떠나기 싫어했을 만큼 한국 방문은 라오스 아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한국을 다녀간 아이들이 라오스로 돌아가 입소문을 냈는데 이런 부분도 라오스 정부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결국 라오스 정부는 야구팀에 관심을 드러냈고 우리의 요구들을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총리 훈장과 대통령 표창을 수여한 것이죠.”

 

1986년 9월3일 프로야구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한 삼성 라이온즈의 이만수 선수 ⓒ연합뉴스


 

라오스 총리는 이 이사장에게 훈장을 수여하면서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이사장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는 생각에 평소 마음에 담아뒀던 야구장 설립을 요구하게 된다. 라오스에는 단 하나의 야구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라오스 정부는 스포츠타운을 건설하면서 2만1000평의 부지를 야구장 건립을 위한 용도로 무상 제공하기로 했다. 이 이사장은 지난해 7월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 라오스야구연맹(Lao Baseball Federation)을 창립했다. 정부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이를 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회상했다. 라오스에서 야구가 입소문이 나면서 서로 야구팀에 들어오려는 경쟁이 치열하다는 후문이다. 초창기에는 20명 안팎이었던 야구팀이 지금은 초·중·고로 팀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양적, 질적 팽창을 이뤘다. 대표팀에서 뛰는 선수들 수준은 우리나라 중학교 1학년 정도의 실력이라는 게 이 이사장의 설명이다.

 

라오스 정부로부터 받은 부지에 진짜 야구장이 만들어지는 건가요? 건설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야구장 4개와 보조구장, 수영장, 숙소 등을 건립하는 게 목표인데 돈이 없어 지금은 잠시 보류 중에 있습니다. 야구장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어요. 문화체육관광부와 외교부에 관련 서류들을 제출, 지원금을 요청한 적도 있었고 국회의원, 기업가 등을 가리지 않고 만났습니다. 모두 어렵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라오스는 공산주의 국가라 약속을 중요시하거든요. 땅을 내줬는데 무상으로 제공받은 땅에 야구장이 들어서지 않으면 그들은 저를, 우리 야구팀을 신뢰하지 않을 겁니다. 야구장이 없는 아이들은 현재 축구장에서 훈련하고 있어요. 야구장을 직접 본 적도 없습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야구장을 본 겁니다. 요즘 야구장 건립 문제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예요. 전 원래 야구 보급을 위해 라오스를 찾았지만 지금은 스포츠를 통해 민간외교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고 있습니다. 그 바람이 계속 이어지길 소원합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1904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한반도에 야구를 전파했을 때 한국 야구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라오스에 야구장이 세워지고, 야구 씨앗들이 성장해 메이저리거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로 자라난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언제까지일지는 아직 모르지만 전 라오스에 주춧돌만 세우고 싶습니다. 결과는 제 뒤를 잇는 사람의 몫이 되겠죠.”  

 

프로야구 팀을 떠나 세상과 부딪혔을 때 가장 힘든 부분이 무엇이었나요. 


“거절당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게 힘들었습니다. 제가 재능 기부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한테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살았을 겁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부족하다 보니 자꾸 부탁을 하게 됐습니다. 야구 선수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적도 있었고, 메이저리그 코치를 거쳐 KBO리그 코치, 감독을 할 때만 해도 승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제외하고는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항상 최고의 호텔에서 최고의 식사를 했었죠. 지금은 경비 절약을 위해 직접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지방에선 모텔에 묵습니다. 언론 플레이에 능하다는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보여주기 식의 위선적인 행동이란 지적도 있었죠. 모든 소문들은 가슴에 담아뒀습니다.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제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2012년 10월29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2012 팔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 전 SK와 삼성의 경기 4회말 원아웃 상황에서 홈런을 날린 SK 최정이 이만수 감독과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1호 안타, 1호 홈런, 첫 100호 홈런, 첫 트리플 크라운(한 시즌 타점, 타율, 홈런 부문에서 모두 1위)을 달성했고, 수차례 홈런왕에 오른 야구인이 화려한 이력을 내려놓고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이사장은 라오스의 ‘야구 전도사’뿐만 아니라 KBO 육성부위원장을 맡아 유망주 발굴과 아마추어 선수 육성에 참여하고 있다. 전국의 초·중·고를 돌며 재능 기부를 이어가고 있고 여자야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어느덧 환갑의 나이지만 체력만큼은 자신 있다고 큰소리친다. 

 

야구 재능 기부도 좋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져야 할 테니까요.


“주로 강연을 통해 생기는 수입으로 생활비를 대신합니다. 제가 어느 한 곳에 얽매여 있으면 재능 기부 활동을 하기 어렵거든요. 해설위원 제안도 받은 적 있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광고를 찍은 건 모두 기부하고 있고요. 예전엔 생활비가 어느 정도 나가는지 몰랐어요. 관심도 없었고요. 아내 말로는 감독할 때보다 1.5배 정도 더 많이 지출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필요할 때마다 사비로 충당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하는 일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아내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제1회 이만수 포수상’이 포문을 열었습니다. 2017년 12월 제정된 상으로 한 해 최고의 활약을 펼친 아마추어 엘리트 선수들에게 포수상과 홈런상을 만들어 시상했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뜻깊은 시상식이었을 것 같아요.

 

“재능 기부를 하면 할수록 포수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특히 유소년들일수록 어렵다고 생각하는 포수를 기피하는 현상이 늘고 있더라고요. 그 상황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대로 된 포수가 나오려면 최소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전문적으로 포수를 육성하고 앞으로 프로야구를 이끌 대형 포수를 만들고자 ‘이만수 포수상’을 제정한 것입니다. 이 상이 ‘이영민 타격상’처럼 권위 있는 상으로 꾸준히 지속되길 기원합니다.”

 

프로야구가 그립진 않나요?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건 제가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선택을 받아야 가능한 건데 그런 일에 얽매여 신경 쓰고 불안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좋은 일 하면서 희로애락을 느끼면 되는 거 아닐까요? 야구를 통해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그걸 돌려드리고 싶어 재능 기부에 나선 겁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있어요.”

 

최근 NC 다이노스를 이끌던 김경문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한때 같은 길을 걸었던 동료였기에 김 감독의 퇴진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친구로서 가슴 아팠습니다. 전 한 번 경험해 봤잖아요. 프로야구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선수입니다. 자신만 잘하면 되니까요. 그다음이 코치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거든요. 가장 힘든 자리가 감독입니다.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전 SK를 이끌 때 마음속으론 항상 사표를 안고 다닌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막상 자리에서 내려오니까 내 삶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울해지더라고요. 김경문 감독도 지금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일부러 전화 안 하고 있어요. 시간이 지난 다음에 하려고요.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김경문이라면 분명 어려움을 딛고 나올 것입니다.”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했다는 이만수 이사장. 나이를 먹으니 ‘고쳐 써야’ 하는 일들이 늘어난다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는 라오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야구의 중심을 이루길 희망했다. 그런 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라오스 대표팀의 아시안게임 출전이 성사되길 바란 것이다.  

 

“지금은 당연히 불가능해 보이겠죠. 하지만 한국 야구가 어떤 과정을 통해 발전해 나갔는지를 떠올린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지금은 어렵더라도 20년, 30년 뒤에는 라오스 야구가 국제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팀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 야구처럼요. 그게 가능해진다면 전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화성시 드림파크에서 만난 라오스 아이들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야구장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이었지만 더위는 그들의 야구 열정을 막지 못했다. 훈련을 마친 한 아이가 인조잔디 위에 누웠다. 분명 등이 뜨거울 법도 한데 아이는 일어나기 싫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야구 전도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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