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과 거래한 사법부, 신뢰의 기로에 서다
  • 유지만 기자 (redpill@sisajournal.com)
  • 승인 2018.06.18 10:42
  • 호수 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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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전교조·통진당 사건 등으로 청와대와 거래…특별조사단 보고서 분석

 

헌법상 독립을 보장받고 있는 사법부가 ‘신뢰의 기로’에 섰다. 박근혜 정부 시절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청와대와 정치권에 광범위하게 로비를 벌이고, 이 과정에서 각종 시국사건의 재판을 정권에 유리하게 추진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사법행정권 남용 특별조사단’은 5월25일 사법부가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각종 재판 결과를 놓고 정권과 ‘거래’를 한 정황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가 여러 주요 사건에 대한 재판을 정권에 유리하게 해 주면서 상고법원 설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의 의중을 광범위하게 살피고, 이를 통해 상고법원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려 시도했다. 또 전교조 사건과 통진당 해산 사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 재판 등으로 청와대와 거래하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6월11일 고양 사법연수원 앞에서 법원 노조원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및 관련자 형사고발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거래 카드’로 쓰인 원세훈 사건

 

특별조사단이 발표한 조사보고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다. 그의 이름은 조사보고서에 100차례 이상 등장한다. 지난 1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2차 조사였던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행정처가 원 전 원장의 2심 재판부 의중을 파악해 청와대에 알려주려 한 정황이 담긴 문건을 공개했다.

 


 

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법원 기획제1심의관 사용 컴퓨터 저장매체 중에서 발견된 파일 중에는 원 전 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및 국정원법 위반 사건의 선고 다음 날인 2015년 2월10일 작성된 문건이 있었다. 이 문건에는 원 전 원장 판결에 대한 청와대(BH)의 의중을 분석하고 판결 후 어떤 정무적 움직임을 보일지 면밀히 분석한 내용이 들어 있다. 당시 이 사건이 상고심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기로 하는 한편, 이를 통해 상고법원과 관련한 주요 의제 추진을 모색하자는 제안도 포함돼 있다. 조사단은 ‘법원행정처가 원세훈 사건에 대한 항소심 판결 선고 전후에 걸쳐 특정 외부기관과 사이에 특정 재판에 관한 민감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고, 항소심 판결 선고 후에는 외부기관의 희망에 대해 사법부의 입장을 외부기관에 상세히 설명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외부기관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한 것은 사법행정권이 재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재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고,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2015년 10월6일경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원세훈 사건 환송 후 당심’ 문건은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보고됐다. 해당 문건에는 원세훈 파기환송 후 사건의 심리상황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동안 쟁점화되지 않은 공모관계에 관한 의심스러운 정황이 드러나 이에 대한 재심리가 불가피하다는 재판부의 판단을 보고한 내용이 들어 있다. 조사단은 특히 문서 말미에 주목했다. 이 문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재판장과 주심 판사와 통화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조사단은 “문건의 작성자는 재판부가 정확한 홍보를 위해 소속 법원의 공보관에게 제공한 정보를 알 수 없는 경위로 지득(知得)해 현안보고 내용으로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사법부는 또 원 전 원장 판결의 결과에 따른 예상 시나리오도 작성했다. 2015년 2월9일 원 전 원장의 항소심 사건 선고를 하루 앞둔 2월8일 작성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관련 검토’ 문건에는 청와대의 반응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대응방안을 논의한 내용이 들어 있다. 임 차장은 당시 원세훈 항소심 사건이 선고되기 전에 항소기각의 경우, 파기 및 유죄선고의 경우 등 상황별 대응 시나리오를 마련하기 위해 이 문건의 작성을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6월1일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전교조·통진당 사건도 청와대와 교감

 

법원행정처는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과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심판 사건도 청와대와 ‘거래’하려 했다. 특조단이 공개한 문건을 보면 상고법원 입법을 추진했던 대법원은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심판 사건’과 함께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을 중요 현안으로 꼽아 청와대와 ‘윈윈’하는 방향을 검토하며 선고 시점까지 치밀하게 고려했다. 

 


 

특조단이 공개한 2014년 12월3일 작성 문건은 당시 법원행정처 임종헌 기조실장의 지시로 작성됐다. 이 문건에는 서울고법 행정7부(재판장 민중기)가 2014년 9월 전교조의 법외노조 통보 효력 정지 신청을 인용하자, 행정처가 청와대의 입장을 분석해 “크게 불만을 표시. 비정상적 행태로 규정. 사법 관련 최대 현안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만일 재항고가 기각될 경우 대법원의 각종 중점 추진 사업에 대한 견제·방해가 예상됨”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 “대법원의 최대 현안은 상고법원 입법 추진 → 이에 대한 BH(청와대)를 비롯한 각계 협조·지원이 절실”하다며 “(고용노동부의) 재항고 인용 결정은 양측에 윈윈의 결과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다른 문건인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에는 당시 임종헌 실장이 청와대와 구체적인 거래를 추진한 정황도 등장한다. 문건에는 “그동안 사법부가 VIP(대통령)와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 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함”이라고 적혀 있다. 그 사례로 ‘①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국가배상 제한 등), ②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사회적 안정을 고려한 판결(이석기, 원세훈, 김기종 사건 등), ③국가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염두에 둔 판결(통상임금, 국공립대학 기성회비 반환, 키코 사건 등) ④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KTX 승무원, 정리해고, 철도노조 파업 사건 등) ⑤교육 개혁에 초석이 될 수 있는 판결(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VIP와 BH에 힘을 보태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조단은 “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민정수석 등 청와대에 대한 설득 또는 압박의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기조 역시 유지하고 있었는 바 이는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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